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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Jun 02. 2018

용기를 내야지  

5. 못다한 이야기

"아빠, 이거 풀어줘."


아이 둘을 데리고 ‘세사미 스트리트’와 함께 행복한 불금(이라고 쓰고 독박 육아라고 읽는다)을 보내고 있던 도중, 큰애가 어디선가 풍선 하나를 가지고 왔다. 살짝 바람이 빠진 걸 보니 묶은 지 오래된 풍선이다. 몇 번 시도해봤으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한쪽 팔에는 둘째가 걸터앉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계속 풍선하고만 씨름할 수 없어 일단 포기하려고 아이에게 말했다.  


"수현아 아빠 못하겠어. 이거 어려운 거야."


그렇게 툭 던지고 돌아서려는데, 아이의 얼굴이 영 마뜩찮다.

"아빠아, 용기를 내야지!"

"..."


제대로 한 방 얻어맞았다고나 할까.


그런 거구나. 그동안 용기가 부족했던 거로구나. 오래된 풍선 매듭 하나를 푸는 귀찮음과 싸우는 데도 실은 꽤나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세상사 모든 일에 필요한 게 다른 게 아니라 용기일 수도 있구나. 아버지가 떠난 후 살아온 지난 시간이 자못 힘들게 느껴졌던 것도 어쩌면 내게 용기라는 것이 부족해서였을 수 있겠구나. 


조금만 어렵게 보여도, 조금만 낯설어도, 뭔가를 더 잃을까 봐, 그래서 내 마음이 한 번 더 다칠까 봐 두려웠던 게로구나. 나란 존재는.


아들 말대로 용기를 냈다.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생각의 전환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고, 의미없고, 시간낭비인 일을 아이가 괜시리 시킨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늙은 풍선의 매듭을 푸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마치 죽기 전 해야 할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만난 사람처럼 매듭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마음 속으로 내건 유일한 제한조건은 인터넷으로 ‘오래된 풍선 매듭 푸는 방법’을 찾아보지 않는 것. 수현이는 어찌됐든 빨리 풀어주면 장땡이었겠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빠니까. 원래 뭐든 만들어달라는 것, 해달라는 것 있으면 찾아볼 것 없이 척척 다 해주는 사람이 판타지 세계의 아빠 아닌가.


온 집안을 뒤져 머리핀 세 개를 찾아냈다. 그런데 이리저리 꽂아봐도 영 쉽지 않다. 결국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나서 다시 심기일전, 차분히 심호흡을 하고 바람빠진 풍선과 마주앉았다. ‘핀이 아니면… 좀 더 두꺼운 연필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핀을 내려놓고 이번엔 연필을 풍선매듭 사이에 찔러넣고 이리저리 돌려본다. 결국 푸는 데 성공! 유레카! 오 신이시여 제가 정말 이걸 해냈단 말입니까!


이게 뭐라고 혼자 감격에 겨워 눈물까지 나오려고 하는 차에, 풀린 풍선을 내려다보니 쭈글쭈글 영 볼품없다. 풀리자 마자 푸쉭 소리를 내며 당장 부풀어오르기 전의 조그만 모습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매듭지어진 지 오래여서인지 서로 끈적하게 달라붙어 축 늘어진 것이 꼭 탯줄 모양이다. 저런 모습을 보려고 아들이 풍선을 풀어달라고 한 건 아닐텐데. 내일 일어나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혹시 모르지. 아이 눈으로 보면 다른 재미있는 것이 생각날 지도. 아이들에겐 어른이 갖지 못한, 그런 신비한 힘이 있으니까.


아빠가 되니, 자식에게 크게 배우는 날도 온다. 고맙다 우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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