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민 Mar 18. 2020

아버지의 파란 마스크

3. 겨울

삶은 늘 예상과 다른 쪽으로 흘러간다. 커피 한 잔 내려서 책상에 앉아 차분히 글을 쓰며 보내는 육아휴직...은 역시 망상에 가까웠다. 휴직계를 내자마자 둘째 어린이집이 한 달간 공사에 들어갔다. 기나긴 한 달이 겨우 끝나갈 즈음에는 코로나19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상륙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신조어와 함께 바깥나들이도 자연히 줄었다. 즉,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예상보다 더 늘었다는 이야기.


온라인 쇼핑몰에서 마스크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더니, 사람들이 약국 앞에 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약국의 마스크 재고 현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앱도 나왔다. 코로나 19 사태가 한 달가량 이어지면서 전에 사두었던 마스크 개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3대가 모여 살다 보니, 매주 소비하는 마스크 수량도 적지 않았다.


마스크 5부제 시행이 확정된 주말 저녁, 아내와 나는 각자 어느 요일에 가서 우리와 아이들 마스크를 사와야 하는지 알아보고 있었다. 우리 둘이 이야기하고 있던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는 ‘잠시만…’ 하시곤 서랍장에서 뭘 주섬주섬 꺼내서 가지고 나왔다.


파란 마스크 한 뭉치였다. 이 정도면 한 달은 더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이게 어디서 나셨대요?”라고 하려는 찰나, 머릿속으로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항암치료를 받고 나면 늘 한 꺼풀 더 약해지곤 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병원을 나올 때 늘 파란 마스크를 썼다. 그 마스크였다. 돌아가시고 나서도 마스크 한 뭉치가 집안 어디에 남아 있다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선물 

못다 쓰고 간 마스크들.


마스크를 보는 순간, 적어도 아이들 씌울 마스크 여분이 생겼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남기지 말고 다 쓸 때까지 좀 더 살다 가셨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하는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이래서, 자식 낳아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을 하는 것일 게다.


아버지가 미리 알고 마스크를 아껴 썼을 리야 없지만, 파란 마스크 한 뭉치가 발견된 후 집안에는 다시 평온이 감돌기 시작했다. 파란 마스크를 다 쓸 때까지는 공적 마스크를 사러 가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보다 더 마스크가 긴급한 사람들이 있을 테니. 어린이용은 아니지만, 적당히 맞춰 쓰면 되지 않을까 싶다.


불현듯 5년 전 생각이 났다. 본인도 항암치료 중이라 성치 않은데, 손자가 배가 아프다니 둘러업고 정신없이 응급실로 달려가던 아버지 모습. 그때는 메르스가 한창 유행하던 시즌이었다. 아버지가 다니던 종합병원도 메르스 확진 환자가 다녀가서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응급실 문을 열어제끼던 아버지가 이번엔 손주들을 위해 마스크를 선물했다.




수현이가 눈은 안 오지만 자고 일어나면 산타가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 갔으면 좋겠단다. 둘째는 엄마 티셔츠를 머리에 감더니 갑자기 ‘나 산타 같지?’ 하며 산타 놀이를 한다. 애들이 왜 갑자기 때아닌 산타 타령인가 했는데, 아이들은 느끼고 있던 걸까. 지난주에 할아버지 산타가 자기들 몰래 조용히 다녀갔다는 것을. 큰애가 요새 꽂혀 있는 스타크로스 장난감이나 둘째가 좋아하는 엘사 드레스는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걸 몰래 남겨놓고 갔다는 것을.


수현이가 갑자기 또 배가 아프단다. 얼른 데리고 병원에 가야겠다. 이 녀석, 꾀병은 아니겠지?

이전 06화 둘만의 마지막 외식, 짜장면 한 그릇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