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소고기와 삼겹살

2. 가을

by 자민

아버지는 삼겹살을 좋아했다. 삼겹살 두어 줄을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고 소주 한 컵(잔이 아니고 컵이다) 걸칠 때의 아버지 표정은 여전히 생생해서, 펜을 쥐면 지금이라도 당장 쓱쓱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상추쌈에 소주 한 입 털어 넣은 후 “키야~” 하며 넣던 추임새까지, 잊힐 날이 오긴 할까.


입사하자마자 한동안 사택 생활을 했다. 어차피 서울이 아닌 바에야 고향인 대전으로 발령받았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면 그게 일반인인가, 마미손이지. 대학 때 학술답사 한 번 간 것 외에는 발 디뎌본 적 없던 전라도에서 꼬박 네 해, 20대의 후반부를 보냈다.


전주에서 근무할 때는 제법 신입 티를 벗은 시점이었다. 전주는 대전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닿는다. 부모님께 주말에 한 번 오시라 했다. 아들 있을 때나 구경하지 언제 전주 구경하시겠냐고 다 커서 떼 아닌 떼를 좀 썼다.


첫 번째 전주 나들이 날, 나름 잘한다는 게장 집과 유명한 비빔밥 집에 갔는데 예상과 달리 부모님의 반응이 영 신통찮았다. 그다음 해에 한 번 더 놀러 오시라고 했다. 이번에는 경험치가 좀 쌓인 만큼 미리 알아둔 근교의 소고기집으로 갔다. 대접할 때 가장 실패율이 낮은 메뉴는 뭐니 뭐니 해도 소고기 아니겠는가. 근사한 인테리어는 아니지만, 도축장에서 멀지 않아 고기 질이 좋은 한 정육식당이었다.


두꺼운 도마 위에 나온 한우 모둠을 양껏 먹었다. 물론 소고기니까 싸진 않았지만, 부모님에게 한 턱 못 쏠 만큼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니었다. 식사를 시킬 때 즈음 아버지에게 더 드시겠냐고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밖에서 이렇게 소고기 많이 먹어보기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아빠는.”


아들이 사주는 고기라서 그냥 하는 소리라고 하기에는 레알 진담이었다. 그 한마디가 툭 떨어졌을 때의 기분은 뭐랄까... 묘했다. “아 뭐야 아빠 삼겹살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이렇게 장난기 섞어 대꾸하기에도, “아버지, 그동안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하셨으니 많이 드세요”라고 예의 차리며 대답하기도 애매했다. 그냥 “아 그러시냐”라고 하며 대강 넘어갔다. 다 먹은 후 배 두드리며 식당에서 나왔고, 그다음에 뭘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돌이켜보건대, 아버지의 한마디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한우 생고기를 그렇게 많이 구워 먹어본 날은 그때까지 아버지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을 것이다. 소고기를 너무 많이 드신 나머지, 속에 담고 있던 본심을 당신도 모르게 자식에게 내보인 게 아닐까.


삼겹살에 소주도 물론 좋아했지만,

소탈한 아버지라도 육즙 흐르는 소고기 맛을 왜 몰랐겠는가.


그걸 자식으로 근 서른 해 넘게 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명절을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멀다는 핑계로 명절 때 얼굴을 가끔 비치는 사위 손에 매번 소고기 한 덩이를 들려 보내는 손 큰 장모님 덕분이다. 예쁘게 포장된 상자에서 소고기를 꺼내 한 점 구워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아버지와 함께 먹었던 그날의 소고기를 추억했다.


지켜보던 엄마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너희만 맛있게 먹지 말고 아버지도 한 점 구워주란다. 산적도 불고기도 아니고 생등심구이를 제사상에 올리는 집이 어디 있냐고 툴툴대다가 성화에 못 이기는 척 한 접시 구워 제사상에 올려놓았다.


아버지는 내게 ‘부디 헤프지 말고 아껴서 아들 딸 잘 챙겨 키우라’ 하시겠지. ‘늦은 밤 몰래 남은 소고기 꺼내 먹지 말고. 네게도 술안주는 역시 삼겹살이 그만’이라는 말도 함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