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을
오랜만에 아이들 손을 잡고 외식을 하러 나섰다. 아이들과 함께 밖에서 밥을 먹으려고 하면 선택지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매콤한 음식은 아이들이 먹을 수 없으니 리스트에서 삭제. 굽는 음식도 자칫하면 혀를 데일 수 있으니 가능하면 피한다. 투닥투닥 장난치다 음식을 엎지르기 쉬우니 테이블도 널찍한 곳이 좋다. 이러다 보면 결국 갈 만한 곳이 몇 군데로 좁혀진다. 짜장면이냐 파스타냐.
고민하다 근처 중국집에 갔다. 모처럼 온 중국집이니 탕수육 하나 시켜야지. 기분 좋은 일로 외식하는 거니 오늘은 그냥 아니고 ‘찹쌀’ 탕수육이다! 물론 소자로.
“탕수육 하나, 짬뽕 둘에 짜장면 하나 주세요. 그리고 아이들 나눠먹을 수 있게 그릇 하나 더 주시겠어요?”
탕수육 한 점 집어 들며 아이들이 오물오물 먹는 것만 바라봤다. 오늘은 너 좋아하는 짜장면이니 제발 다 먹어라.
늘 아이들 먹고 남은 음식 처리하는 게 일이다. 수현이는 유난히 입이 짧아서 음식을 자주 남긴다. 항상 ‘오늘 이만큼은 먹겠지’하고 차리면, 늘 그것보다 적게 먹는다. 남은 음식이 아까워 내가 다 먹을 때도 꽤 있다. 소싯적엔 나름 맛집 깨나 찾아다니던 사람이었는데, 애들 남긴 음식이나 먹는 아빠가 될 줄이야. 짜장을 입에 잔뜩 묻힌 채 모처럼 정신없이 먹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날 풍경이 떠오른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외식.
어딜 다녀오는 길이었을까. 아마도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었겠지. 매일같이 병간호하느라 붙어 다니던 어머니도 없고 그날은 나와 아버지 둘 뿐이었다. 남자 둘이 말없이 터벅터벅 동네 어귀를 들어오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말했다.
“짜장면이나 한 그릇 먹고 갈까?”
길가의 허름한 중국집에 들어섰고, 아버지와 식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짜장면 두 그릇 값은 육천 원. ‘서울에서 먹는 짜장면 한 그릇 값도 안되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새 짜장면 두 그릇이 아버지와 내 앞에 턱, 턱 놓였다.
후루룩 후루룩. 우리는 말없이 짜장면 면발을 집어 입안에 넣었다. 늘 그렇듯 짜장면은 맛있는 음식이지만, 그날의 식사는 뭐랄까... 돌이켜보면 참 어이없는 풍경이다. 다 큰 남자들은 왜 다들 그런 걸까. 둘이서 여전히 말 한마디 없이, 짜장면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양념 하나 남김없이 비울 때까지 그릇만 파먹고 있었다.
그날 그 짜장면 한 그릇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마주하고
먹는 마지막 외식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면,
나는 그렇게 조용히, 아무 말 없이, 단숨에
식사를 마칠 수 있었을까?
좀 더 살갑게 굴 순 없었을까. 오래 못 봤던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좀 하지. 하고 싶은 말이 가슴속에 그득했을 텐데.
아버지와의 마지막 외식은 그렇게 조용히 끝났다. 둘이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다신 오지 않았다. 신은 그렇게 쓱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와 대면할 기회를 내주었는데, 나는 그 마지막 기회를 내발로 걷어차버렸다. 삼천 원짜리 짜장면 먹는 외식쯤이야 자갈밭 돌처럼 흔하다는 생각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시간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라는 젊은 오만으로.
늘 나중에야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곤 한다. 그 짜장면집은 서울 사는 네가 보기엔 허름해 빠진, 돼지고기 몇 점 없는 싸구려 짜장면이나 파는 집 같지만, 아버지가 꽤나 좋아하던 집이었단다. 그런데도 이 앞을 지나가며 어머니가 한 번 먹으러 가자고 하면, 집에 밥 있는데 뭐하러 밖에서 돈 내버리냐고 역정내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단다. 고작 삼천 원인데.
그러니까 그날 아버지는 이미, 아들에게 당신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내려온 아들이랑 둘이 마주 앉아 밥 한 끼 하고 싶다고. 다만 말을 안 했을 뿐. 아버지는 모처럼 당신이 좋아하는 식당에 가서 나름 맛있는 음식 한 끼 내어놓고 아들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게다. 그냥 그렇게. 말 한마디 없어도 좋으니까.
짜장면 값을 내가 냈는지 아버지가 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냥, 내가 냈다고 믿고 싶다. 마지막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