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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Jan 20. 2020

아빠, 빨간 띠 땄어!

5. 못다한 이야기

아이는 내 마음대로 자라지 않는다. 무엇을 가르쳐보려 한다면 더 그렇다.


처음에 시작한 것은 축구였다. 한동안 주말을 이용해서 집 근처에 있는 FC서울 유소년 축구교실에 데리고 다녔다. 물론 축구선수가 되길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노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도록  운동량을 늘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라인 밖에서 지켜보니 아이들 축구도 몸싸움이 나름 치열했다. 또래에 비해 몸집이 작은 수현이는 한 시간 수업 내내 볼터치 두어 번에 만족해야 했다. 아이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석 달을 채우지 못했다.


축구를 통해 나름 쓴 경험을 한 후, 한동안 수현이는 블록놀이, 종이접기 같이 방 안에서 손으로 만지며 노는 것들만 좋아한다고 지레 단정해버렸다. 어머니는 제 아빠 어릴 적이랑 똑 닮았다며 유전 탓을 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 날, 동네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유치원 또래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오후에 태권도를 배우러 가니 같이 다니고 싶어진 것.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태권도장에서 아이들을 픽업하고, 수업을 마친 후에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시스템이었다. 퇴근 시간까지 조금이라도 애들이 집에 오는 시간을 늦출 수 있는 고마운 장치이기도 했다.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한 후 아이는 띠를 하나씩 가져오기 시작했다. 흰띠부터 시작해서 보라띠, 주황 띠, 밤색띠 같은 것들을 매고 왔다. 띠들이 새끼를 쳤나? 어렸을 적엔 분명 검은 띠까지 중간 단계가 몇 개 없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들어보니 아이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요즘 태권도는 띠가 예전보다 몇 개 늘었단다.


평소보다 출근시간이 여유 있던 날, 유치원 버스에 태워 보내려고 같이 나가던 길에 아이가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아빠, 나 빨간 띠 땄어!"


뭐랄까,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살면서 이뤄낸 가장 큰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빨간 띠는 일곱 살 아이에게도 다른 여느 띠들과는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던 게다. 원장 선생님처럼 검은 띠는 아직 못 매지만, (만 15세 미만에서 맬 수 있는 가장 높은 띠인) 품띠의 절반은 빨간색이 아니던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앉아 대단하다고, 훌륭하다고 토닥여줬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고 있는 아이가 기특했다. 유치원 버스가 오기 전에 아빠에게 서둘러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잡고 있는 손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이뤄가는 성취들은 부모에게 감동을 준다. 잘한다 싶으면 그것만큼 신나고 즐거운 일도 없다. 세상 수많은 엄마 아빠들이 자기 자식이 신동이 아닐까 지레짐작하고 설레발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적어도 나는 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을 겪으니 애써 내 마음을 부정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띠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속으로는 '더 시켜야 하나? 혹시 선수까지 되는 것 아닐까? 축구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태권도도 뭐 나쁘지 않지......' 이렇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쭉 뻗어가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원 참.


아이는 버스를 타고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긴 야근에 찌든 아빠의 피곤함을 날려버린 채.


출근하던 길에 아버지를 떠올렸다. 살아계셨던 동안 나는 자식으로서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감격을 안겨줬던 것일까. 그 감격의 총합은 본인 바람과는 다르게 커가는 과정에서 안겨드렸던 섭섭함의 총합과 맞바꿀 수 있을 만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답은 알 수 없다. 물어볼 수 없다. 언제나 그렇듯 하늘 한 번 빤히 쳐다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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