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데이 파더스 클럽 (1)
작지만 아늑한 집을 마련했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답시고 가구는 최소한으로 줄였다. 원룸 시절부터 가졌던 꿈을 이루고자 방 한 칸에는 따로 서재도 마련했다. 그동안 사 모았던 책들을 모조리 꽂아두어도 여전히 넉넉한 책장을 보며 혼자 배시시 웃었다. 좋아, 더 이상 너저분하지 않아.
거실에는 화이트 톤의 맵시 있는 테이블도 하나 들였다. 매서운 겨울이었지만 방바닥은 따뜻하다 못해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베란다 창 밖으로 흩날리는 눈송이를 보며 뜨거운 원두커피 한 잔 내려놓고 가만히 바닥에 등을 뉘었다. 몸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십여 년 전 겨울, 이맘때의 일이다.
알록달록 뽀로로 매트가 거실 바닥을 덮치던 날, 나의 미니멀리즘 시대는 짧지만 뜨거운 안녕을 고했다. 지극히 좋아하는 단정한 투톤 컬러와 대척점에 있었지만, 두툼하고 푹신한 뽀로로 매트는 첫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아기에게는 두말할 나위 없는 최적의 세팅이었다.
그렇게 화이트와 블랙, 그레이톤으로 가득했던 그 공간을 뽀로로와 크롱, 루피와 에디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차례로 점령해나갔다. 집은 시간이 갈수록 야수파도 울고 갈 법한, 거침없는 원색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빠가 되어간다는 것은 내가 소유하던 걸 아이에게 하나씩 내어주는 과정이다. 집은 아기와 함께 하는 공간으로 점차 변해갔다. 싱글일 때 꿈꾸었던, 나만의 온전한 공간은 아기의 성장과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그 변화가… 딱히 나쁘지 않았다.
종일 누워서 하늘만 보던 아기는 어느 순간 몸을 뒤집었고, 걷기 시작했고, 말문이 터졌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멋모르고 시작했던 육아 생활도 햇수가 꽤 쌓였다. 첫째는 분명히 옆에서 꼬물대고 있었는데, 어느덧 끊임없이 조잘대기 시작하더니, 이제 학교 물도 조금 먹어 본 십 대가 되었다. 날마다 투닥대긴 하지만 그러면서 동생 먹을 요구르트도 챙겨주는 놀라운 모습도 시전한다. (아주아주 가끔!)
지나고 돌이켜 보면 금방이다. 인생사 모든 게 그러하듯. 가끔씩 구글 포토에서 예전 사진들을 모아 앨범으로 띄워주면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넋 놓고 보게 된다. 신이여, 사진 속 저 아이가 정녕 지금 제 옆에 있는 이 아이란 말입니까? 휴대폰을 한 번 보고, 다시 옆을 보고, 다시 휴대폰을 본다. 노느라 정신없는 저 아이는 시간을 헤치며 경이로운 속도로 커 가고 있다. 아빠로서 기억하는 과거는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간다.
사진과 영상은 순간을 포착해 저장해둘 수 있지만, 그 시절 품었던 생각과 느낌까지 오롯이 잡아 두지는 못한다. 아이가 200mg 분유를 한 번에 다 먹었을 때, 조금 품이 커진 기저귀를 차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때, 분명히 “아빠!” 비스름한 감탄사 한마디를 내뱉을 때 느꼈던, 그 희열의 감정이 어느새 어슴푸레해졌다.
또 한 차례의 십 년이 지나 아이가 스무 살 청년이 되었을 때, 나는 지난 겨울 어느 날 이 친구가 꺼낸 말 한마디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까? 영 자신이 없다.
“아빠, 부자가 뭔 줄 알아?”
“... 응?” (설마 얘가 벌써 돈의 맛을?)
“에이 그것도 몰라? 아빠랑 나잖아!”
장난스레 툭 던진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컹, 하고 녹아내렸다. 그래… 그렇네. 돈 많은 부자로 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돈이 없어도 이미 부자인 걸 깜빡하고 있었다.
‘이런 대화는 오래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 이런 생각이 가슴에 들어찼다. 대수롭지 않게 말한 당사자는 분명히 잊어버리기 쉬운 그 말을, 나는 아빠로서 오래오래 남겨두고 싶다. 기억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해 두는 것이겠지. 사라지지 않도록. 한 해동안 이어질 뉴스레터가 올해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소중한 이야기를 부지런히 기록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32년 어느 날의 스무 살 청년을 상상해본다.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부모 품에서 독립할 그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혹시라도 그가 이 글을 꺼내어 볼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미래가 왔을 때도 지난 겨울처럼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해맑게 웃음 지을 수 있는, 그런 흐뭇한 작업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 그래서 뽀로로 매트는 어떻게 되었냐고? 이번 달 드디어 현역에서 은퇴했다.
다음 책이 언제 나올 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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