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민 Apr 17. 2022

대치동에 꼭 가야 할까?

썬데이 파더스 클럽 (2)

학부모라는 무게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영어 떼야해. 그래야 수학 진도 나가지.”


학부모가 되니 유치원 때와 다른 고민에 빠져든다. 아이와 손잡고 학교 문턱을 넘는 벅찬 순간을 만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장래를 고민할 시각이 째깍째깍 다가온다. 누군가는 옆에서 말한다. “이미 늦었는지도 몰라, 한국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취학통지서를 손에 쥔 날을 아직 기억한다. 그날 아내와 나는 비록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함께 잘 가르쳐보자며 파이팅을 외쳤다.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길 바라는 마음은 모든 부모가 매한가지다. 그냥 부모도 아닌 ‘학’ 부모가 되었으니 힘닿는 한 아이의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 관심 있어하는 게 보이면 최대한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다.


부모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삶은 예상보다 녹록지 않다. 아이가 어릴 때 무심코 차 본 축구공이, 혹은 타 본 스케이트가 그저 재미있어서 열심히 하게 되고, 남보다 잘하게 되면서 결국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그런 드라마 서사는 펼쳐지지 않았다.


현실에서는 아이가 무엇이든 몇 달이나마 계속하면 그저 감지덕지다. 큰 아이를 키우며 다시금 깨달았다. ‘아, 역시 드라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구나.’ 처음에야 축구도, 태권도도, 수영도 “나도 할 수 있어!” 하며 신이 나서 시작하지만, 아이는 곧 빛의 속도로 흥미를 잃는다. 생각해보면 세상 오만 가지에 관심이 뻗쳐 있는 아이들이 무엇 하나를 꾸준히 지속하는 건 이례적인 성장 패턴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제2의 손흥민, 제2의 조성진 아빠라는 꿈을 자연스레 내려놓았다.


아이는 벌써 3학년이 되었다. 분명 학교에 몇 번 등교하지도 않았는데… 줌으로 수업 몇 번 받았을 뿐인데…. 그렇게 신동이 넘쳐난다는 예체능 영역에서 숨겨진 재능을 발견할 기회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결국 ‘이 아이도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즈음, 아차 싶은 마음이 더럭 든다.


공부라고 쉬울 리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부모와 아이가 이인삼각 전력질주를 하고 있어 보인다. 입시 환경이 과거와 너무 달라진 탓에 좋은 대학에 보내려면 “초등학교 3학년까지 영어를 끝내고 수학에 올인해야” 한단다. 지인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만 정신이 아득해져 마시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대치동에 가야 할까? 아니면 목동? 지금이라도? 무리해서라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가장 큰 문제는 아이 스케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유치원과 달리 초등학교는 점심때 일과가 끝난다. (그 사실을 진학 직전에 깨달았고, 당시 충격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어떻게든 아이가 집에 오는 시점을 퇴근 시간 뒤로 맞춰야 했다. 일곱 살 때 다니던 태권도만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나았으려나. 못내 아쉬워하며 겨우 등하교를 도와주는 동네 영어학원을 찾아 보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이 알아서 버스로 아이를 픽업해 공부를 시켰다가 다시 집에 데려다주는 식이다.


지금까지는 맞벌이로 인한 오후 보육의 공백을 집 근처 학원으로 간신히 메우고 있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아이 학습에도 신경 써야 하는 시점을 마주하고 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젖먹이 때도 그랬지만, 가지 않은 길이기에 막막함이 느껴지긴 분유 물 온도 맞출 때나 마찬가지다.


학부모가 될 용기


“수학을 잘하려면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니?”

“아자! 할 수 있다! 이런 거요?”

“그건 객기고, 문제가 안 풀릴 때는 화를 내거나 포기하는 대신에, ‘야, 이거 문제가 참 어렵구나, 내일 다시 한번 풀어봐야겠구나’ 하는 여유로운 마음, 그런 게 수학적 용기다. 그렇게 담담하니, 꿋꿋하게 하는 놈들이 결국엔 수학을 잘할 수 있는 거야.”


자사고 학생들의 입시 준비를 소재로 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 학성과 지우의 대화다. 고교 시절 수학에 대한 부담감이 적지 않았던지라 나도 모르게 ‘수포자’인 주인공 지우(김동휘 역)에게 감정 이입하며 영화를 봤다.


지우 곁에는 수학을 가르쳐주는 경비원 학성(최민식 역)이 있다. 학성은 지우에게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용기’, 말하자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이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더라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여유롭고 담담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문제를 직시하는 능력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우리에게도 필요한 건 용기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도, 그리고 내게도. 맹모삼천지교라는데,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더 좋은 학군으로 더 많은 학원이 있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부담은 되지만 아이의 미래를 위해 좋은 선택이라면, 혹시 나로 인해 아이가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되면 어쩌지란 두려움을 안은 채.


부모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는지, 현명한 아이는 언제나처럼 가만히 TV를 보다 무심하게 한 마디 툭 던진다.


“아빠, 내일 나 혼자 학교 갈래.”

“정말? 괜찮겠어?”

“응. 혼자 갈 수 있어. 이제 나도 3학년이니까.”


아이는, 잘 자라고 있다. 영어도 수학도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레벨’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하나씩 스스로 해나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부모가 떠나기 전 남겨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유산이 교육이라면, 그 교육의 성취가 반드시 ‘좋은 학교’로만 연결될 필요는 없다. 아이 인생은 아이의 것. 그가 나중에 무엇을 꿋꿋이 해나가며 자신의 삶을 꾸려갈지 아직은 예상하기 어렵다. 어쩌면 축구, 태권도, 수영도 잠시 쉬며 숨을 고르고 있는 시기일 수도 있다.


대신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용기,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두드리고자 하는 꿋꿋하고 담담한 마음가짐을 꼭 배웠으면 한다. 장차 더 어려운 문제가 눈앞에 닥치더라도 삶을 스스로 지탱하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다. 그럼 부모로서 난 무얼 해야 할까. 이 아이의 마음속에 자신만의 용기가 조금씩 자라나려면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찾아봐야겠다. 그것 또한 나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아이는 오늘 처음, 혼자서 학교에 갔다.


내 손을 잡지 않은 채, 자기 혼자서.


뚜벅뚜벅.


그래, 나도 더 용기를 내야겠지.


객기 말고, 용기를.




정민@jm.bae.20

  

다음 책이 언제 나올 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썬데이 파더스 클럽 구독 링크


이전글


굿바이, 뽀로로 매트


썬데이 파더스 클럽을 시작합니다


* Photo by Siora Photography on Unsplash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