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엔딩

3. 추억을 상속받다

by 자민

봄이다. 길을 가다 우연히 흩날리는 벚꽃비를 맞고 혼자 마냥 즐거워할 수 있는, 어김없이 <벚꽃엔딩>을 음원 차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그 계절.


친척 모임에 참석하느라 어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길을 나섰다. 꽉 막힌 서부간선도로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는 길이 살짝 고역이긴 했지만, 초록빛으로 물든 산들 위로 곳곳에 쓱쓱 물감 칠한 듯 피어 있는 개나리와 진달래, 들판을 수놓고 있는 배꽃과 복숭아꽃들을 눈에 담을 수 있어 즐거운 드라이브 길이었다. 세상 누구라도 빙그레 웃음 지을 수밖에 없는 시간을 골라야 한다면 아마 아기가 방긋 웃는 모습과 지천에 꽃들이 활짝 피어있는 정경 두 가지가 정답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하며.


따스한 봄날, 팔자 좋게 꽃구경을 겸해 운전을 하다 보니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기억은 흐르면서 계속 뭉뚱그려지는지라 이젠 고등학생 때인지 대학생 때인지도 확실치 않다. 나른한 봄이었고, 그날도 이번 주말처럼 따스했다는 것뿐.


온 가족 모두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할머니 댁에 가는 길이었다. 봄이었으니 아마도 할머니 혼자 밭일하느라 고생하신다고 일손 도우러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봄꽃들이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개나리고 진달래고 곱디고운 색깔을 뽐내고 있었는데, 아마 그때 꽃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운전하느라 창밖을 바라보던 아버지뿐이었던 것 같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나는 “이야~ 기가 막힌다! 저 꽃들 좀 봐라!”라는 아버지의 감탄사를 듣고서야 비로소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산과 들을, 꽃들을 바라보았다. ‘뭐 진달래네...’ 하고 여느 사내자식처럼 영혼 없는 반응을 하고 있던 즈음, ‘쿵!’하고 한순간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살면서 처음 겪은 추돌사고. 진달래꽃에 꽂힌 아버지가 그만 너무 길게 한눈을 파셨던 것.


큰 사고는 아니었으나, 앞차와 그 앞차까지 연달아 박은 3중 추돌이었고 누가 봐도 100% 아버지의 과실이었다. 본인도 처음 겪어 당황했지만 어쨌든 가장으로서 가족들 앞에서 이 일을 빨리 수습하려고 진땀 빼는 아버지와, 수리비와 보험료 걱정하며 옆에서 속상해하고 있는 어머니와, 차들을 세워둔 길 한편에서 얼마나 기다려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건지 그저 툴툴대고만 있는 나와 동생의 그날 모습이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있다.


운전대를 잡은 채 혼자 빙긋이 웃었다. 난생처음 겪었던, 다들 너무 놀라 가슴을 쓸어내린 나름 큰 사고였는데, 십수 년 후 지금은 그저 꽃길을 달리며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되어 있구나.


옆자리에 앉아있는 어머니에게 "그날 혹시 생각나세요?"라고 물으려다, 날도 좋은데 괜히 아버지 생각나서 우울해지실까 봐 입을 닫고 머릿속으로만 그날의 에피소드를 혼자 즐겼다. 진달래꽃이 그렇게 예뻤던가... 뭐 운전석이 뒷자리보다 꽃이 더 잘 보이긴 하지... 하며, 봄날 아지랑이처럼 연달아 피어오르는 아버지와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한적한 시골길을 달렸다.


아버지는 봄꽃과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주목받는 자리에 있었던 적 없었지만, 늘 때가 되면 자기 자리에서 예쁘게 피어나는 사람. 그래서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드는 사람(술 취했을 때 어머니 마음은 그만큼은 아니었겠으나). 이름 없는 봄꽃의 자태가 마냥 고와서였나, 자신을 닮아 그날 그렇게 오래, 감탄사를 연발하며 눈을 떼지 못하셨나... 살아계셨을 땐 가족들 사이에 ‘꽃구경하다 황천길 갈 뻔했지...!’ 하며 아버지의 산만한 주의력을 탓하며 꺼내 들곤 하는 이야깃거리였는데, 이젠 먼저 황천 간 아버지의 천진난만했던 모습을 대표하는 에피소드로 매해 봄마다 되새기게 될 것 같다.


길가의 벚꽃잎도 슬슬 떨어져 가고, 그 사이로 초록 잎새들이 돋아나고 있음을 본다. 이렇게 봄이 지나고, 새로운 계절이 오고, 한동안 잊고 있다가 또 <벚꽃엔딩>이 들리고 벚꽃잎이 휘날리는 때가 오면 나는 이렇게 또 그날의 자동차 사고와, 그날 내 눈으로 봤던 그 개나리와 진달래를 떠올리겠지? 매해 새로이 피어나는 봄꽃들을 마주하며, 적어도 아들에게는 꽃보다 아름다웠던 사람을 추억하고 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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