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지탱하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이므로
원작자의 의도를 백 퍼센트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받아들이는 자의 입장은 그야말로 백인백색, 천양지차다. 다양한 이들이 제각기 제 이야기라고 해석하게 만드는 콘텐츠는 그래서 힘이 있다. 보고 들은 사람의 숫자만큼 새롭게 태어나게 되므로.
영화 '벌새'를 봤다. '배캠'의 영향으로 자리에 누워서도 삼풍백화점 생각이 떠나질 않던 차에 에라 그냥 일어나 휴대폰에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아껴둔 막대사탕 같은 영화였는데... 이참에 까먹어버리기로 했다. 아끼다 뭐하나. 다 똥만 되지.
'벌새'는 1994년, 중학교 2학년 은희의 성장을 그린다. 학번으로 치면 99학번이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채송화 친구 정도 되시겠다. 직접 극본을 쓰고 메가폰을 잡은 김보라 감독은 "자기 안의 고통에 빠진 아이가 자신과 거리를 두며, 세상과 만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단다. 감독은 꿈을 이뤘고, 개인의 경험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를 우직하게 끌고 가며 보편성에 가 닿는 데 성공한다. 보고 나면 수많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괜히 상을 준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길다 싶은 느낌도 있긴 했는데, 자기가 쓴 극본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를 제 손으로 편집하는 감독을 상상해보면, 2시간 18분 러닝타임도 준수하다 못해 경이롭다. 한 페이지 남짓 쓴 글도 내 손으로 줄이려면 한 문단도 아까운데. (후기를 찾아보니 역시나 가편집판은 3시간 반이나 되었다 한다. 거의 1/3을 잘라낸 거다. 오 마이 갓.)
은희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영지 선생님은 칠판에 명심보감의 문장을 쓴다.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중학교 2학년인 은희가 얼굴을 아는 사람은 매 학년마다 만난 친구들을 따졌을 때 사백 명 남짓. 그러나 그중 네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느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은희는 머뭇거리고 만다. 그 장면을 보는 나 역시 머뭇거렸다.
휴대폰 연락처에 하나 둘 쌓아 두기 시작한 사람의 수는 어느새 천 명을 훌쩍 넘었다. 도중에 몇 번 휴대폰을 바꾸면서 꽤 많은 번호들이 사라졌음에도 그 정도다. 그중 서로 마음을 안다고 할 만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릴 때는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한데, 신기하게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회사생활을 하면 할수록 예전만큼의 자신감이 없어져 간다. 죽마고우라 생각했던 친구들은 일 년에 한두 번 겨우 보면 다행이다. 하루에 열몇 시간씩 같이 프로젝트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새벽까지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동료들은 이제 간간이 카톡창에서나 겨우 안부를 전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 부모님 두 분의 휴대폰을 바꿔드렸었다. 커플폰이었다. 그런데 새 휴대폰으로 아버지 주소록을 옮겨드리다 그만 예전 폰에 저장해 둔 연락처를 모두 날려버렸다. (통신사에서 일한다고 언제나 휴대폰을 잘 다루는 건 아니다.) 아버지는 손재주 없는 아들 덕분에 예전 수첩을 꺼내 하나하나 다시 사람들 이름과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해야 했다.
그런데, 수기로 옮긴 전화번호는 채 몇십 개가 되지 않았다. 수첩 속 나머지 이름과 전화번호는 새 휴대폰에 다시 적히지 않았다. 주소록은 조촐했다. 육십 년 넘게 살았고, 사십 년 넘게 회사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주소록에 남은 것은 가족과 친지, 나도 알 만한 친한 벗 이름들 고작 몇 뿐이었다.
나중에 엄마가 해준 말에 따르면, 그 얼마 안 되는 주소록만 갖고도 마지막 한 해동안 아버지는 큰 불편 없이 지내셨다 한다.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점점 더 뜸해져 아버지는 슬퍼했단다. 그가 슬펐다. 연락이 오지 않아서.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서. 나 아직 이렇게 살아있는데. 통 연락 없는 조용한 휴대폰만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진 어떤 마음이었을까.
은희는 힘겨웠던 순간, 한 줌 빛처럼 자기에게 쏟아져 내려온 선생님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별을 맞는다. 새벽녘 애도의 과정을 거치며, 은희는 한 뼘 더 성장한 채 친구들의 품으로 돌아간다. 좋은 이별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은희는 선생님이 남긴 편지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불안한 시절, 유일하게 마음이 통했던 사람과의 좋은 기억을 안고서.
은희의 옆에 한 사람 한 사람 더 제 마음을 아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가길 바란다. 가족이었으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아니었을 아버지와도, 오빠와도 화해했기를. 잠시 멀어졌으나 다시 친구가 된 지숙이와도 오래도록 좋은 친구로 남기를. 수학여행 버스 속에서 평생 주소록에 간직하고픈 새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 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