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인종, 국적, 종교를 가진 인간 군상이 모여 있다 보니 ‘설마’ 하는 일들도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곳이 비행기다.
좌변기가 흔하지 않은 어떤 나라의 비행에서는 사람들이 볼 일을 본 후 물을 내리지 않는 것은 기본, 심지어 변기 덮개 위, 바닥, 세면대에 대소변을 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화장실 바닥은 물인지 뭔지 모를 액체로 넘치듯 찰랑거린다. (그러니 제발, 기내 화장실에 맨 발로 들어가지 마시라...!)
화장실 옆에 대기하고 있다가 승객이 들어갈 때마다 일일이 좌변기 사용법을 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런 불상사(?)가 생기면 우리는 그저 문에 ‘고장’ 스티커를 붙이고 착륙할 때까지 열지 않는다.
크루들과 갤리(항공기의 주방)에 모여 수다를 떨다 보면 정말 별의별 경험담을 다 듣게 된다. 비행기를 처음 타 보는 승객들이 저지르는 이런 더럽지만 사소한 실수들은 그저 웃어넘기게 되지만, 개중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왕왕 일어난다.
한국인 동료가 겪은 일이 그렇다.
한 젊은 부부가 신생아를 안고 승선했다.
부부는 어김없이 기내용 수하물을 모두 좌석 앞 복도에 방치해 두었고, 한국인 동료는 다가가 좌석 위 짐칸에 짐을 보관하라고 안내했다. 2세 이하의 아이를 데리고 탄 승객의 경우, 필요할 때 기저귀며 젖병을 빨리 꺼낼 수 있도록 짐을 가까운 곳에 두려고 하기 때문에 짐칸 사용을 당부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비상탈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바닥에 놓인 짐들은 탈출의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수하물은 반드시 선반에 넣어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륙 전 마지막 안전 점검을 하러 기내를 돌던 동료는 부부가 당부한 대로 가방을 모두 치운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신생아를 데리고 탔던 부부가 아이 없이 앉아 있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이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부부에게 아이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 부부는 가만히 동료를 올려다보며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켰다.
‘아, 설마... 설마...!’ 하며 다급하게 짐칸을 열어 본 동료는 거의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가 수하물과 함께 짐칸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나는 소리를 질렀다.)
한국인 동료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순진한 얼굴로 앉아 있는 부부에게 당장 아이를 꺼내라고 호통을 쳤더랬다.
이 젊은 부부에게 짐칸은 아이를 편안히 재울 수 있는 요람으로 보였던 걸까, 아니면 아이와 수하물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걸까.
여성의 영혼이 무참히 짓밟히는 광경도 목격된다. 프랑스 동료가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한 남편이 기내에서 자신의 아내를 주먹으로 쉼 없이 때렸다. 피를 흘리며 ‘help me!’를 외치는 아내를 무시하고 폭력을 가하는 남편을 크루가 제지하자 남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She's my wife. I can do whatever I want!"
여전히 부인을 자신의 소유물쯤으로 여기고 원하는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여성이 누군가의 재산이 아니라, 존엄성과 고유성을 가진 한 개인임을 완전히 깨닫기에는 21세기는 아직 이른 것일까. 종교적 이유로, 과거로부터 답습된 문화라는 이유로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목소리를 제거당한 채 살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비극인가.
지구의 어떤 곳에서는 성별이나 종교, 계급에 따라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또 박탈된다. 또는 처음부터 부재한다. 내가 자라 온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가치와 상식이 보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회도 있다는 것. 내게는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도, 당연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성별과 종교, 계급 등 모든 조건의 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닫는 것과는 별개로 이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너무도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행동양식들이 비행기라는 좁은 공간에서 가감 없이 드러난다.
나는 때때로 경악하고, 연민하며 또 분노한다. 7년을 꼬박 일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사랑한다 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을 혐오하는 마음과 그래도 이해하려는 마음이 늘 싸우기를 반복한다.
얼마 전, 스페인에서 휴가를 떠나려는 부모가 10살 아들의 서류 문제로 함께 여행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아들을 공항에 버려두고 탑승해 아동유기혐의로 기소됐다는 기사를 보았다.
고등교육을 받는다고 모두가 올바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난과 종교, 성별, 문화를 떠나 적어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불변의 사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우고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