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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위안

by 작중화자

어린 날의 밤을 걸었다. 가로등에 벌레들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여름밤에, 축구장의 소음이 먼 파도소리처럼 밀려오다 경의선과 함께 쓸려가는 육교의 끝자락에 이르러, 부윰한 저녁의 귀퉁이를 붙잡고 나는 내 불안을 잠재웠다.

마지막 걸음에는 늘,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아 졌다.

산책은 오랜 위안이다. 변화하는 계절을 오롯이 느끼면서, 내가 인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번뇌를 여의게 하는 가장 다정한 위로.

그래서 가까운 곳에 산책을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내게 아주 중요하다. 천천히 걷든, 뜀박질을 하든, 자전거를 타든, 마음에 짓눌려 한숨마저 가슴에 턱 하고 걸릴 때마다 숨을 토해낼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주는 길. 행신동의 둑길이 그랬고, 김포장릉의 산책로가 그렇다.




Creek Park는 두바이에서의 내 안식처다. 돌고래 수족관과 어린이 놀이 공간, 원형극장까지 있는 규모가 꽤 큰 이 수변공원은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유독 힘든 비행을 한 다음날 공원에 가곤 하는데, 칩거 생활을 하는 두바이의 여름이 지나 날씨가 선선해지는 계절이면 더 자주 공원을 찾는다.

공원 곳곳에는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어 주말에는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로 공원이 시끌벅적해진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없는 평일에만 간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 하나는, 두바이의 공원은 입장료가 있다는 점이다. 2세 이하의 아동은 무료, 그 위로는 3~5 디르함(약 1100원~1800원)을 받는다. 사막 위에 지어진 탓에 공원의 유지관리비가 만만치 않게 들 것임을 생각하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기꺼이 지불하게 되는 가격이다.


입장료를 받는 공원답게 Creek Park의 잔디와 수목은 관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 커다란 나무 주위로 스프링클러가 물을 뿜어대고 화단마다 점적 호스가 설치되어 있어 비가 귀한 나라임에도 공원은 일 년 내내 푸르다.

산책을 하다 보면 카키색의 작업복을 입고 커다란 예초기를 몰거나 화단을 가꾸는 직원들을 볼 수 있는데, 가장 뜨거운 시간에는 나무 밑 그늘에 줄줄이 누워있기도 한다. 그들의 노고 덕에 울창한 나무와 잘 다듬어진 잔디를 보면 두바이가 아닌 호주의 보타닉 가든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


공원에서 걷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가져간 캠핑의자를 편다. 한동안 앉아서 강을 바라보다 또다시 걷는다. 그렇게 자리를 옮겨 다니며 책을 읽거나 멍을 때리면서 하루를 보낸다.

잎사귀 사이로 산란하는 빛, 시시각각 사정없이 부서지는 초록, 강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수를 헤아리고, 비둘기가 아닌 새의 소리를 듣는 즐거움. 그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이, 오후의 태양이 등 뒤로 바짝 다가선다. 해가 기울수록 나무의 그림자는 자라난다. 덩달아 길어진 나의 그림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등에 손을 얹는다.

‘모든 게 다 괜찮다.’


점심 즈음에 공원에 가서 해가 지평선 한 뼘 높이에 걸릴 때쯤에야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나는 이런 게으른 산책에서 힘을 얻는다.




산책을 하기 위해 공동묘지에 간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프랑스 파리의 페르 라셰즈(Père Lachaise)나 교토 청수사(清水寺, 기요미즈데라)의 언덕에 자리한 도리베노 공원묘지, 프라하 호텔 뒤편에 있는 공동묘지 등 비행을 가서도 나는 무덤가를 찾아다닌다.


큰 소리 내는 사람이 없어 늘 조용하면서도 자연 본연의 활기로 가득한 곳이 묘지다. 바람과 개울물 소리, 흙먼지 날리는 소리, 이곳에선 자연의 소리가 더욱 선명해진다. 더불어 인적 드문 무덤가는 청설모나 딱따구리, 개미나 자벌레와 같은 작은 생명체들의 차지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소란은 기내를 채운 온갖 잡다한 소리와는 다르다.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혼곤해진 정신과 예민해진 오감을 치유하기에 묘지만 한 곳이 없다.



무덤가에서 생은 더 분명해진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내 뒤에 남을 사람들과 내가 이루지 못할 꿈들, 박탈당할 ‘내일’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고, 그 상실들이 죽음의 순간과 그 이후의 미지보다 내겐 두려운 것이다.

그렇게 번뇌의 무지갱을 기어오르다, 죽은 이들의 사이를 걷다 보면 내 삶은 놀라울 만큼 생생해진다. 일의 고단함도 현실의 비루함도 땅 밑에 누워있는 저들이 갈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 괴롭던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아 진다.




어디에 있든지 스스로 안온할 수 있는 장소는 필요하다. 다행히도 내겐 그런 곳들이 있다. 그 안에서 걸으며 길가에 핀 들풀의 이름을 하나씩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오늘의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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