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민구 왈왈

커피란 무엇인가

커피에 대한 고찰

by 아빠 민구


잠이 덜 깬 무거운 아침이었다. 시간은 좀 부족했고, 아내가 어제저녁에 내려놓은 식은 커피가 보였다. 텀블러에 한 가득 채우고 현관을 나섰다.


목을 축일 겸 찰랑이는 텀블러를 비워나갔다.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지고 속이 쓰렸다. "이거 거의 잿물인데?" 은 커피는 식도를 긁으며 위장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커피는 나를 비웃으며 "조금만 참아, 그 대신 각성을 줄게 크크큭-"이라고 말는 것 같았다.


밤새 원두가루가 잠겨 있었던 커피에서는 놀라우리만치 강력한 카페인이 들어있었고, 더 놀라운 수준의 흙탕물 맛이 났다. 향이라곤 없는 '카페인의 집약체'같은 검은 물이었다.

과학자들은 '커피가 몸에 좋다', '커피가 몸에 나쁘다'라며 매 번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고, 사람들은 그 걸 보며 커피 섭취에 대한 득실을 계산한다.


연구를 떠나서 그 맛에 심취한 사람들이 예전에 믹스커피로 돌아가지 못하며 스페셜티를 찾고 각 카페의 시그니쳐 커피를 찾는다.


그도 아닌 사람들은 아이스커피의 시원함을 쫓거나, 카페의 향기와 분위기를 찾는다. 다 나름의 이유로 커피를 찾는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아침 내가 삼킨 커피는 맛도, 향기도, 분위기도 아니었다. 책임감이었다. 바디감 묵직한 책임감 한 모금이 불쾌하게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아이들은 이제 검은색 물을 보면, "커피는 아빠 꺼"라는 의견을 덧붙인다. 커피가 어떤 맛인지- 왜 먹는지- 언제 먹는지 등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아빠가 먹는 검은 물'일뿐이다.




: 커피란 무엇인가?

하루를 또 살아내야 하는 아빠의 책임감이라고 한다면 맞을까. 맛도 향도, 분위기도 배재된 진-한 카페인의 결집체를 삼킨다는 것은 '그 책임감'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닐 것이다. 그 검고 쓴 물을 통해 직장에서 버틸 기운을 얻고, 세상을 살아갈 정신을 차리고, 미래를 더듬어가는 용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커피를 마시는 이유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인해, 당장 눈앞에 무엇인가를 감내하고 조금 더 앞의 무언가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자 고통의 시작일 것이다. 당장에 마주할 여러 가지 일들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커피 한 사발 쭉- 들이키고 발랑거리는 심장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가족을 먹여 살릴 책임감을 끌어올리는 것이, 모닝커피다.



: 커피란 무엇인가?

직장인들은 출근하면 무심하게 커피를 마신다. 특별한 의미나 영양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는 하나의 의례를 치르는 것처럼, 커피를 마신다. 그런 의미에서 직장인들의 모닝커피나, 어머니가 달에게 소원을 빌 때 떠 놓는 정화수나, 망나니가 목을 치기 전에 칼에 칼에 뿜어내는 술이나 다 같은 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의식이라는 차원에서, 맛이나 향을 떠나서 아침마다 커피를 꼭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장님부터 말단 직원까지 마찬가지이다. 맛있으면 좋겠지만 맛없어도 그만이다. 의식을 위한 준비물로써, 커피는 이미 토속이며 풍속이다. 의식이 잦을수록 더 일이 잦고 과중하다고 볼 수도 있다. 술병을 줄 세우듯 커피잔을 줄 세우면, 우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습관처럼 일처리를 위한 의식을 치르고 삶을 살아나가는지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 커피란 무엇인가?


커피는 타인과 마주할 때 우리의 자아를 지켜주는 한 꺼풀의 보호막이자 원만한 관계를 위한 윤활유이다. "커피 한 잔 하겠냐"는 물음으로 어색한 만남의 시작을 빗어낼 수 있고, 대화 중 부담스러운 시선처리나 언어의 공백을 메울 수도 있다.


할 말이 끊어지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시선 처리가 부담스러우면 커피잔을 보거나 커피를 휘휘 저어도 좋다. 너와 나 사이의 무언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특히 감정적으로 어려운 대면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 사이에 놓인 커피잔은 우리의 시선도, 부담도 받아내며 제 자리를 지킨다. 남북한의 긴장감을 흡수하고 있는 DMZ가 이런 느낌일까. 커피는 그 존재 자체로 시간도 흡수하고 시선도 흡수하며 우리의 자아를 한 겹 덮어주며 그 자리에 있는다.




고작 식어빠진 커피 한 잔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고민을 해 보았지만, 누군가는 떨어지는 사과에서 또 누군가는 욕조에서 넘치는 물을 보며 모든 현상에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처럼. 카페인을 잔뜩 머금고 공복의 식도를 지나가는 커피를 통해, 뭔들 못 끄집어낼까.


커피는 무엇인가. 책임감이고 의식이며 보호막이다. 아이에 눈엔 그냥 쓴 검은 물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지 않을까. 그 한 잔에 담긴 많은 의미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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