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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Oct 21. 2021

빨래 감옥

일의 파도타기


여름에서 겨울이다.


집안 서랍 여기저기에서 여름옷들이 쏟아져 나온다. 장롱 속 리빙박스에서 가을과 겨울 옷들이 또 쏟아져 나온다. 아이들 입히라며 여기저기서 물려받았다가 아직 열어보지도 못한 옷들도 이에 질세라 쏟아져 나온다.


거실은 순식간에 옷으로 꽉.


며칠 전 아내와 나는 교도관이 되어, 어떤 옷을 남기고, 어떤 옷은 석방시킬지를 고민하며 날밤을 지냈다. 옷들의 운명이 아내의 손짓과 나의 고갯짓 하나로 결정되는 심판의 이었다.


심판한 건 우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로 우리는 일주일이 넘게 빨래 감옥에 갇혀버렸다.


버릴 옷들과 나눌 옷들, 기부할 옷들을 분류하고 나서 우리 집에 얼마간 체류가 승인된 여름-가을-겨울 옷들이 수 백 벌이었다. 아이들 옷은 아이들이 수시로 크고 또 동생들이 물려 입기 때문에 사이즈 별로 다 있었고, 아내와 나의 옷은 살 빠지면 입어야지- 하면서 사이즈 별로 쌓이고 있었다.


게다가 여섯 명이 아침저녁으로, 특히 신생아들은 툭하면 용변 묻고 침 흘리며 갈아입는 옷들이 매일같이 스무 벌은 세탁기로 몰려왔다. 수건들도 하루에 열 장 정도가- 양말도 너댓 켤레가- 세탁기로 몰려왔고, 철 바뀐 이불과- 코피 묻은 베개피와- 모자와 가방과 아기띠까지- 매일같이 세탁기로 몰려온다.  


세탁기가 아침, 오전, 점심, 저녁, 야간, 새벽으로 끊임없이 돌고, 건조기가 이어받는다. 건조기가 토해낸 옷과 이불, 가방과 아기띠는 다시 우리 집 소파에 쌓이고- 손쓸 시간 없어 그렇게 쌓이고 쌓인 빨래들은 소파에서 흘러내려 거실을 채운다.


우리 여섯 식구 지내기도 좁은 거실에 빨래가 다시 감옥이 되어 우리를 가두고 있었다. 우리는 빨래 감옥에- 그렇게 일주일을 감금되어 있었다. 빨래에, 집안일에 파묻혀 버렸...


일에 파묻혔다고 하기에는 또 너무 억울한 것이다. 대단한 성과가 있는 일도 아니었다. 삶의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일이었는데- 그 일에 '파 묻혔다', '갇혔다'라고 하기엔 너무 무기력해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파도에 허우적거리면 바닷물에 빠져 죽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파도를 타고 신나게 즐기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일의 파도타기를 해야 한다. 빨래의 파도타기를 해야 한다. 신명 나게 해야 한다.


빨래 감옥에서 출소하여 돌아보니 그렇다. 빵에서 나온 선배가 해주는 말처럼, 하나의 교훈이 생겼다. 우리는 일의 파도타기를 해야 한다. 거기에 매몰되면 안 된다.


아, 그리고 아내에게 정중히 건의한 게 있는데, 우리 집 남자 네 명은 앞으로 스티브 잡스처럼 한 가지 옷만 사이즈 별로 사놓고 사 계절을 입는다고 말했다. 아침마다 고민할 필요도 없고, 옷가지 숫자도 파격적으로 줄어들 것이니까- 제발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빨래 감옥에서 막 출소한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아내에게 혼나고, 다시 열심히 빨래를 개고 있다. 어제 낮에 잠깐 입은 아이들 잠바를 왜 또 빠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니까 아이들이 감기도 안 걸리고 잘 지내지 않을까- 하고 '이해'해본다.


빨래 감옥에서는 출소했지만, 매일같이 빨래 구치소를 들락날락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일에, 빨래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어떻게 하면 빨래의 파도타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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