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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Nov 22. 2021

가방을 산다는 것

조금 찌질한 고백



나는 여러 가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 한 인간이다. 그 수많은 콤플렉스 중 한 가지는 가방에 관한 것이다. 오늘은 조금 찌질한 나의 가방 콤플렉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대부분의 콤플렉스가 그렇듯, 나의 가방 콤플렉스의 시작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창 시절, 특히 중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같은 노스페이스 가방을 가지지 못했던 나는 늘 '좋은 가방 하나 가졌으면-!' 하는 결핍에 시달렸다.


사실, 단순히 결핍이라고 보기에도 좀 애매한 것이- 임관을 해서 내 힘으로 돈을 번 이후에는 언제든지 고깟 '가방' 하나 정도는 언제든지 살 수 있었는데 사지 못했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하나의 콤플렉스라고 본다.


가방이라는 것이 도처에 널려 있기도 하고, 가방의 용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은 언제든 구할 수 있기 때문에 새 가방을 사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삶에 문제가 없다. 실제로 그렇게 20년을 지내봤으니 거의 맞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학창 시절엔 가난하다는 이유로 좋은 가방을 가지지 못했다. 재수 때는 뭐, 재수생이 굳이 좋은 가방 멜 필요도 없으니 좋은 가방을 가지지 못했고. 생도 시절에는 200명이 다 똑같은 브랜드도 없는 가방을 보급받아 썼기 때문에 가방을 살 필요가 없었다.


임관을 한 이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생도 때 받았던 그 가방을 그냥 써도 됐기 때문에 그렇게 지냈다. 노스페이스 가방이나 하나 살까- 하다가도 선뜻 돈을 쓰기 뭐하대체할 수 있는 가방이나 물건들이 눈에 밟혔다.


대위가 됐을 때는 부모님 댁에 매형이 안 쓰게 되어 묵고 있는 낡은 노스페이스 가방이 있었다. 아마 그 가방을 한 5년쯤. 그리고 대위가 끝나 갈 무렵엔 가방을 살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냥 당근 마켓에서 만 원 주고 산 1차 세계대전 느낌의 가방을 사서 그게 한 2년쯤.


그리고 얼마 전 처갓댁에 갔다가 그 1차 세계대전 가방이 너무 작아 물건을 다 담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처남이 더 이상 쓰지 않게 된 낡은 샘소나이트 가방이 있어 그 가방을 쓰게 되었다. 장모님께서는 크로스백으로 쓸 수 있는 어깨 끈까지 챙겨 주셨다.


그 가방을 한 두어 달쯤 쓰다 보니, 내 안에 있는 자아가 '구차하고 비참하다'라고 소리쳤다. 11년 차 월급쟁이가 되어서 가방 하나 사지 못하고 벌벌 떠는 찌질한 내 모습에 화도 나고, 바보 같기도 하고 약간 울적하기도 했다.


진심으로 내면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콤플렉스의 발현이었다.


아내는 내가 가방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며 징징거릴 때마다 "얼른 사-!"라며 종용했지만, 나의 순수하고 오래된 콤플렉스는 외치고 있었다.


"야, 사방 천지에 가방인데 무슨 가방에 돈을 써"


주위를 둘러보면 에코백은 한 네댓 개쯤 발에 채이고, 1차 세계대전 가방과, 처남이 쓰던 샘소나이트와, 매형이 10년쯤 전에 쓰셨던 노스페이스가 아직도 건재했다. 기능주의적으로 봤을 때, 아직 그들은 현역이었다.


매일같이 쓰는 그 '가방'이라는 녀석이 내 안의 콤플렉스를 계속 건드렸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면서 "이번엔 기필코 사리라!"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고민 끝에 아내에게 "가방을 사겠노라"라고 선포를 했다. 물론 아내는 호응해줬다. 하지만 문제는 내 안에 자아가 정말 용기를 내어 한 발짝을 내딛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아이 넷을 데리고 '쇼핑'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고된 일이지만, 우리는 주말 저녁 아웃렛으로 갔다.


사람들이 미어터지고, 쌍둥이 유모차와 양손에 잡은 아이들의 손을 끌고 앞으로 나아가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 목적지는 명확했고, 구매욕은 불타올랐다. 우리는 곧장 파타고니아로 향했다. 리고 순식간에 가방을 골랐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가장 크고 멋진 가방이었다. 가격표는 보지 않았다.


짜릿한 쾌감과 희열이 뒷목을 타고 올라와 정수리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20년 묵은 체증이었다. 정말 남아메리카의 파타고니아 사막처럼, '안데스 산맥에서부터 대서양까지의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깟 가방 뭐라고. 참네.


돌아온 주말, 그 가장 크고 멋진 가방에 불필요하게 많은 짐을 꽉꽉 채우고 처갓댁에 올라가서 처남의 삼니움족 가방을 돌려줬다. 엷은 미소를 띠며 "이번에 가방 새로 사서 이젠 필요 없어요"라고 말씀드렸다.


왠지 기분이 좋다.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몇몇 동료들이 새로 산 가방임을 눈치채고 "가방 새로 샀네"라고 말해줄 때도. 뭔가.


누군가에겐 정말 아무것도 아닌, 별일 아닌 하찮은 것이겠으나- 나에게 '가방을 산다는 것'은 참 콤플렉스 한 일이었다. 그 콤플렉스가 정말 찌질하고 복잡다면한 내면의 자격지심이 아닐 수 없지만, 결국 20년 간의 사투 끝에 집도를 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글을 쓰니 감이 떨어졌는지 별 요상한 주제가 떠올라 그만, 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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