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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Jun 21. 2022

여섯 명이면 호텔방을 두 개 잡아야 하나?#01

그래서 캠핑카를 빌렸지



사실 휴가를 길게 내고 여행을 간다는 것이, 휴가인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었다. 다만, 밥통에 오래 눌러앉아있는 누렇게 말라가는 밥이 되지 않기 위해 리프레쉬는 필요했다.


특히나 육아와 가사만 하면서 30대를 다 보내고 있는 아내에게는 정말 필요했다. 아니, 동생들 문에 어디 놀러 가지도 못하고 맨날 둘이서 장난감만 가지고 놀고 있는 첫째와 둘째를 위해서라도 그랬다. 생각해보니 맨날 방구석에서 엄마 쫓아다니면서 징징거리고 있는 쌍둥이들에게, 어쩌면 여행이 가장 필요했을지 모르겠다.


다만, 행을 준비하기에는 살인적인 일정들이 연속되고 있었다.


화상이며, 감기며, 모세기관지염이며, 설사며 돌아가면서 아픈 네 아이들을 데리고 한동안 일주일에 6일을 병원 순회를 다니고 있었다.


행 바로 전 날이 돌 예배였다는 점도 큰 부담이었다. 돌이고 여행이고 하루하루 쌓여있는 빨래 산을 넘어 다니기에도 벅찬 하루였다. "아, 어쩌지" 하면서 쓰러져 잠드는 날들이 모여 바로 다음 주, 바로 내일이 되어버렸다.


아침 여덟 시부터 나갈 준비를 했는데, 간신히 오후 두  시가 되기 십분 전에 교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돌 예배는 행히 교회 집사님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니 밤은 늦어있었고, 낮에 예배 나간다고 급히 벌려놓은 물건들이 거실과 침실과 화장실을 넘나들며 열심히 나자빠져 있었다.

 


모두가 쓰러져 잠든 사이, 나는 이제 여행을 준비해야 했다.


애초에 여행을 계획하면서 여섯 명이 들어가서 잘 수 있는 호텔방을 구한다는 것이, 만약 방을 두 개 구한다고 해도 어떻게 나눠서 잘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잘 조립되지 않아서 호텔을 포기했다.


차라리 캠핑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캠핑카를 예약해놓았다. 쉽게 말하면 내일 아침에 떠날 캠핑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난리통에 말이다. 이 한밤중에 말이다.


자정이 넘었지만 세탁기와 건조기, 식기세척기를 연달아 풀가동하면서 계획부터 세웠다. 계획이 없어서 멍청비용을 쓰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길바닥에서 멍청시간을 쓰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길을 헤매거나 무작정 갔는데 캠핑을 하기 부적합한 곳이라면. 분명 쌍댕이들을 밥 달라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앉아있기 힘들다고 앙앙 울고 있을 것이고 큰애들은 심심하다고 배고프다고 계속 보채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군더더기 없이 캠핑카를 빌리고! 짐을 옮겨 싣고! 최단시간 내 목적지로 이동해서! 캠핑카를 전개하고! 애들을 풀어놓고! 순식간에 먹을 것을 준비해서! 평화를 확보해야 한다. 중간에 어떠한 지체나 문제가 발생해서는 안된다.


동선이며, 캠핑카를 주차할 수 있는 해변이며, 근처에 먹을만한 식당과 아이들이 안전하고 적절하게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들까지 파악하니 새벽 세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여행 간 입을 옷들과 세면도구, 조리도구, 식자재, 장난감, 수렵채집 도구, 안전장비, 신발과 슬리퍼, 충전기와 전기제품, 기타 캠핑에 필요한 각종 도구들을 챙기니 아침이 밝아왔다.


아침이 되니 한 열 개쯤 되는 가방과 꾸러미들이 현관 앞에 줄을 섰다. 특히, 이불을 챙겨야 해서 짐이 정말 많았다. 이불만 다섯 장을 챙겼으니 말이다.


밤새 네 번을 돈 세탁기와 건조기도 이젠 좀 쉬어야 했다. 식기세척기도 혀를 내두르며 뜨거운 김을 뱉어내고 있었다.

 

혼자서 여섯 명의 여행을 준비한다는 것은 정말. 좋.은.경.험.이.었.다.


내가 왜 호텔을 잡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대륙간 탄도미사일처럼 날아와 정수리에 떨어졌다. 머릿속 자기 합리화의 방공부대가 그 후회를 요격하려고 했지만. 속절없었다.

 

호텔에서 자는 상상을 해봤다. 싱크대도 세탁기도 없는 조용한 방에- 하얀색 시트가 빳빳하게 깔린 넓은 침대- 그 뒤로 음소거된 바다가 보이는 통유리창-


일상의 피로를 집어던지고, 침대에 나를 집어던지고, 울려대는 카톡을 던져버리고, 휴가다운 휴가를 보낼 수 있는 호텔에서의 하룻밤을 생각해보았다.


어림도 없었다. 현실은 가혹했다.


가족들이 깨기 전, 카시트가 네 개 설치된 카니발에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짐가방들을 싣고 잠시 소파에 몸을 던졌다. 아직 여행은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것에 등줄기로 땀이 내렸다.  




여행 시작도 전에 이렇게 길어질 줄 모르고 시작된 글이라, 여기서 한 번 끊어가야겠다. 을 쓰면서도 이렇게 피곤한 느낌은 처음인 것 같다.


다음 편에 계속.


카니발 100% 활용하기. 카시트 네 개, 유모차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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