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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Aug 22. 2022

공습경보 : 전쟁의 서막

바퀴, 벌, 사마귀, 그리고 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친 폭우와 폭염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입추가 지났고 처서가 임박해서 그런가 보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직도 답답하게 구름이 덮여있었지만 비를 내리겠다는 심보는 보이지 않았다.  


"아악!!!"


아내가 비명을 질러 달려갔다. 분명 이번에도 막내들이 변기에 손을 집어넣었겠거니 생각하면서 "아~ 그러니까 화장실 문 잘 닫고 다니라니까 그러네" 라고 말을 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해보니 낯익은 녀석이 상황 파악을 하는지 더듬이를 길게 세워 사방으로 흔들고 있다.


 

찰나의 순간에 많은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녀석과는 20년을 함께 지냈었다. 온갖 종류의 약을 사용해서 녀석을 미워했었고, 한편으로는 훈련 중에 산에서 들에서 만나는 녀석이 반갑기도 했었다. 그래도 동거를 하지 않은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 침실 벽과 천장 사이 모서리에서 만났다.  


녀석은 원래부터 눈치가 빠르다. 상황판단력도 좋고 판단을 뒷받침할 수 있는 빠른 다리와 날개까지 가지고 있다. 여기서 도망쳐 침대 아래나 장롱 뒤에라도 숨어버리면 피곤해진다. 아마 아내는 잡을 때까지 잠에 들지 못할 것이다. 잡아야만 한다.  


"잡았다 요 녀석"


다이슨 중사를 급히 호출해 녀석을 잡아들인 후 풀밭으로 돌려보냈다. 녀석이 아무리 눈치가 빠르다고 해도 벌레와 동거 20년, 벌레잡이는 30년 가까운 나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우리 집으로는 공습이 시작되었다. B-22 말벌 폭격기가 KADIZ를 넘어 우리 집 뒷베란다에 출몰해 위협 비행을 하고 있었고, 앞 베란다에는 특전사마귀가 요인 암살을 하려는 듯 낫자루 같은 앞다리를 세우며 침투하고 있었다. 어제는 그리마가 장갑차처럼 바닥에 붙어 새시 물구멍을 통해서 공격을 감행했고, 아이들 방 어딘가에는 날개 달린 개미가 공수부대처럼 내려앉아 재집 결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정신 못 차리고 밤에 글을 쓰던 내 머리에 달라붙은 노린재가 있었는데, 순간 화를 참지 못했다. 보통은 전쟁포로를 살려서 송환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교전규칙에도 불구하고 처참하게 피를 보고야 말았다. (오 불쌍한 노린재)


생각해보니 그동안 잠잠했던 모기들의 활동도 활발해져서 아이들 팔다리에 모기 물려 부은 자국들이 늘어갔다. 가족을 건드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당장에 전기 파리채를 양손에 들고 풀밭으로 뛰어나가 모조리 튀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끌어올랐다.  


 


하지만 늘 그렇듯, "자연을 괴롭히면 안 돼. 이유 없이 죽이면 안 돼. 관찰만 하고 돌려보내야 해."라고 가르쳐 놓은 상황이라 나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했다. 때문에 방어에 중심을 둔 전술적 기조를 유지해야 했다. 대신 방호력을 보강하기 위해 새시 하단에 물구멍을 막아야 했고, 벌레가 다닐만한 길목에 약을 쳐 야했다. 36년간 녀석들과 살아보고 잡아보고 먹어도 봤던 나에게는 안된다. 거실 중앙에서 눈을 감으니 녀석들 다니는 길은 손바닥 보듯 훤히 보였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녀석들이 기상예보를 보고서 활동을 시작한 것도 아닐 텐데, 유독 폭우, 폭염 뒤에 이렇게 설치는 것은 이 녀석들이 항상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언제나 먹이를 찾고, 짝을 찾고, 숨을 곳을 찾아 최선의 노력을 하는 녀석들이기에 요즘처럼 날씨가 맞아떨어졌을 때는 순식간에 번성하고 활개 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것들을 재고 따지고 있다 보면 결국 타이밍을 놓치고 다른 사람들이 기회를 만나 날아다닐 때 나는 이제 땅속에서 기어 나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마저도 "지금 나가도 괜찮으려나"하는 걱정에 다시 숨어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 된다. 기회가 왔을 때 날아올라야 한다.  



 벌레에서 별 말도 안 되는 교훈을 도출해내는 것 같아 약간 억지스럽지만. 저렇게 좌로 우로 기며 항상 삶에 최선을 다하는 녀석들에게도 배울 점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집에 들어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특히 스텔스 기능을 켜고 날아와 혈액을 도둑질해가는 모기 새끼들은 도무지 봐줄 수 없다. 방공망을 가동하고 야간 순찰조를 보강 편성해야겠다. 오늘 밤은 편히 자길.


출처 : 네온마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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