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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Aug 24. 2022

새벽 두 시, 아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다

아내에게 바치는 파이어



서늘한 날씨지만 오늘의 세 번째 샤워를 마치고

마지막 과업을 향해 내달린다.


내가 집안일을 할 때 순서는 아내와 다르다. 나는 항상 베란다에서부터 정리를 시작해 부엌에서 끝낸다. 내가 생각하기에 부엌살림은 가장 손이 안 가고 꺼려지는 일이다.


부엌으로 가져다 놓은 음식, 쓰레기, 재활용품과 기타 물품들이 싱크대를 점거하고 있다. 그래도 좋은 마음을 가지고 부엌 정리를 시작했다. 이미 새벽 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 시간 가까이 정리를 마치고 나니 아내가 낮에 장을 봐온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애 넷을 데리고 혼자 장을 보러 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무거운 우유까지 들고 왔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다.


그리고 정리가 끝난 부엌에 파 다발이 놓여있으니 그 또한 마음이 안 좋다. 아무래도 저걸 처리하고 잘지 그냥 잘 지를 고민해야 했다. 소파에 앉아 아내가 사다 놓은 요구르트를 마시니 결심이 섰다.


파를 하나씩 꺼내 뿌리를 자르고 시든 잎을 떼어낸다. 가족을 위해 무농약 파를 사 왔는지 손질할 거리가 참 많다. 이리 따고 저리 따고 잘 씻어서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다시 한번 불순물을 제거했다.


가위가 있으면 좋으련만, 모조리 식기세척기에 들어가 있고 가장 무딘 과도만 한 자루 남아있다. 자른다기보다는 거의 자를 대고 선 맞춰 종이를 자르는 것 같이 파를 재단한다. 생각보다 파가 많아 준비해놓은 용기 위로 쌓여만 간다.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자른, 아니 뜯은 파들이 하얀색부터 초록색까지 가지런히 정렬됐다. 아내에게 칭찬받을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가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또르륵. 유기농 파라서 그런지 맵기가 대단하다.


소매로 간신히 눈물을 훔치고 두 용기에 나눠 담은 파를 냉장고 야채칸이 아닌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정성스럽게 놓는다. 아무래도 한 칸 아래가 아내 눈높이에서는 더 잘 보일 것 같아 위치를 고쳐 잡는다. 됐다.

 

아내에게 칭찬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다. 마지막으로 파를 다듬으면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와 하루 만에 가득 찬 20L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온다. 아무래도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이 들었다.


파를 다듬으며 들었던 아내에 대한 나의 마음을 정리해보니 암컷 앞에서 꼬리춤을 추는 극락조나 먹이를 가져다 바치는 수컷 거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약간 더 우회적일 뿐. 내가 새벽 두 시에 파를 다듬는 행위가 한 편의 춤사위와도 오버랩되었다.

  

아내가 연상인 탓도, 토끼띠인 나에 비해 호랑이띠인 탓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남자들이란 아내의 칭찬을 들으려고 안달이 난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굉장히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남편조차도 아내의 인정과 존경이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 무척 노력하는 것이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아내에 대해 열세한 나의 모습은 생각해보니 또 있다. 하루에도 두 번 정도씩 나를 긴장하게 하는 그 단어.


"여보!"


아니 뭐 사실 별것도 아닌 부부간의 호칭인데, 왜 아내가 '여보'라고 부르면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다. 딱히 잘못한 것도 숨기는 것도 없는 나같이 착한 남편이 무서워할 만한 상황은 아닌데 말이다. 그저 그냥 '여보'라고 부르기만 하면 나의 지난 10분, 1시간, 하루를 되돌아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거의 모든 상황에서 잘못한 것이 없어 아무 일 없이 지나가지만 말이다.


아내는 그냥 나를 부르는 거라고 한다. 혼내려고, 지적하려고, 문제가 있어서 부르는 게 아니고- 그냥.


그래서 아내에게 부탁을 좀 했다. 다정 혹은 상량하게, 혹은 친절하게 좀 나를 불러달라고. 나 너무 당황스럽고 깜짝 놀란다고.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숨기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아내도 그렇게 부드럽게 불러주겠노라고 나에게 약조하였다.


하지만 내일 아침은 아내가 또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여보!"라고 불러주길 바란다. 분명 깨끗하게 치워진 부엌과 잘 다듬어진 파를 발견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아내를 위해 파를 다듬느라 새벽 두 시에 눈물은 흘렸고, 그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싶어 이렇게 글은 쓰느라 잠은 좀 덜자지만 그래도 오늘 밤은 좋다. 아이들이 오랜만에 잘 깨지 않고 잠을 잔다. 곤히 자는 아이만큼 천사 같은 모습은 없으리라.

 

네 아이 잘 자는지 확인만 좀 하고 자야겠다. 아내에게 바치는 파이어, 내일 아내 눈에 잘 띄거라.


출처 : 초록마을





* 메인사진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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