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빠 민구 Apr 26. 2023

더블 에스프레소 바닐라 카라멜마키아또

#01 : 어블 에스프레소 바닐라 카라멜마키아또 그란데, 아니 벤티


'빨리'는 그가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항상 시간에 쫓기며 살았고 그 와중에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언제나 서두르며 빠르게 일처리 하는 것은 몸에 배어있었다. 그런 그가 오랜만에 천천히 걸었다. 발길은 카페로 닿았고, 점원의 시선을 피해 느릿하게 메뉴를 골랐다. 사실 메뉴는 진즉에 골랐지만 메뉴판에 뭐가 있나 천천히 살폈다. 그러다 굼뜬 말투로,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심해에 사는 물고기가 에너지를 아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 작은 느림만으로도 벌써 어떤 감정이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주문할게요"


그는 그 긴- 커피의 이름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더블, 에스프레소, 바닐라, 카라멜, 마키아또- 그란데 사이즈로 주세요. 아니 벤티 사이즈요."



그렇게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해 줬음에도 직원은 아직 파악할 정보가 더 있다는 것처럼 메뉴 선정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말이 끝나자 점원은 따듯한 음료를 고른 게 맞는지, 벤티사이즈가 맞는지, 음료는 한 잔만 주문한 게 맞는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매장에서 마시고 갈 것인지 등을 캐물었다. 그는 점원의 질문에 작은 고갯짓으로 '그렇다', '아니다'를 표시했다.  



이렇게 느리게 뭔가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회복의 시간이었다. 굉음을 내며 덜덜 떨리던 자동차에서 처음으로 발목에 힘을 풀어 긴장 가득한 가속패달을 이완시키는 느낌이었다. RPM이 떨어지고 엔진음이 작아지고 속도가 낮아지고 주변 환경이 느리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그는 창문을 내려 손을 뻗고 바람을 잡아볼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2층, 왁자지껄한 카페에서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각자의 기력이 닿는 만큼 목젖의 RPM을 올려가며 무언가 말하거나 듣고 있었다. 그 굉음 사이에서 혼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에서 그는 약간의 쾌감을 느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고요한 이 순간. 팔다리에 힘을 빼고 별 목적 없이 시간의 목줄을 놓아주었다. 시간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초월해 달려 나갔다. 굉음과 재즈가 섞여서 많은 물소리처럼 들렸다. 그 무엇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 오히려 귀에 물이 많이 들어간 것처럼 먹먹하게 느껴졌다.  


 

RPM이 떨어진 엔진이 서서히 식어갈 때 즈음, 그는 눈알을 굴려가며 지난주를 떠올려보았다. 근로소득자로서 다른 사람의 귀한 돈을 받아가며 사는 주제에 감히. 자기가 받는 돈과 스트레스가 등가교환인가에 대한 방정식을 풀어보고자 증명을 한 줄 한 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하루에 작성하는 '(보고서 00개 + 전화통화 00통 + 메일 00통 + 회의 00개)*스트레스*직장 상사의 태도*업무환경 = 월급'의 등가식은 증명하기에 아득해 보였다.  



그는 머리 위로 적어 나가던 증명식을 구겨서 저쪽 어딘가로 던져버렸다. 다시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시간은 사실 그가 신경 써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냥 그런 시간의 고용주 노릇을 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시간을 부리는 것처럼, 시간과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간 위에 올라타 손으로 바람을 잡아볼 수 있는 것처럼.  


 

유독 그에게 모든 업무가 집중되는 것 같았다. 그는 적당히 유능했고, 적당히 충성스러웠고, 적당히 군말이 없었다. 상사들은 그에게 편하게 대해주진 않았지만 편하게 업무를 지시했다. 동료들도, 선후배들도 편하게 그를 찾아와서 이것을 묻거나 저것을 협의했다. 담배도 태우지 않고 특별히 옆 사무실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지도 않았지만 업무는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다리미가 셔츠 위를 미끄러지다 단추에 걸리듯, 퇴근시간만 다가와서 부딪쳤다. 거기선 멈춰야 했다. 더 밀고 나아가다간 단추가 떨어질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다섯 개의 단추가 있었다. 외벌이로 아내와 네 아이를 부양하고 있었다. 셔츠를 다리는 것만큼이나 단추를 떨어트리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퇴근시간이 임박하면서, 그는 더 자주 손목시계를 보고 업무의 속도를 높였다. 단추를 채우러 갈 시간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