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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Apr 26. 2023

더블 에스프레소 바닐라 카라멜마키아또

#05 : 카페 헤이븐

지그 재그 논밭 사이로 워이 워이 차를 몰아가자 카페가 나왔다. 손님은 없어 보였지만 창문이 하나하나 열려있는 것으로 봐서 영업은 하는 것 같았다. 주차 선 없는 가게 마당에 차를 대충 질러 넣었다. 차가 멈추자 주변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어떤 수도원에 딸린 것 같은 마당에는  봄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낮고 좁은 돌계단은 차분히 입구로 이어져 있었다.

"헤.이.븐.."  



그는 문에 붙은 카페 이름을 읽고, 침을 꼴깍 삼키고는 '드르륵' 문을 열었다. 카페 주인은 컵을 닦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컵을 닦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분명 오랜만에 오는 손님일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시선은 주지 않았다.  



이미 카페 창틀과 테이블마다 꽃화분들이 서빙되어 있었다. 커피향보다 꽃향기가 아득한 곳이었다. 왈츠 풍의 클래식이 들릴 듯 말 듯 열어놓은 창문의 봄바람처럼 차분히 흐르고 있었다. 메뉴판에는 '커피, 홍차 종류 가능합니다.'라는 문구만 적혀있을 뿐 세부적인 메뉴와 가격이 적혀있지는 않았다.  



"저기요, 홍차 한 잔 주세요"  



그제야 주인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를 쳐다보았다. 스타벅스의 '무관심 전략'은 무관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계세요, 가져다 드릴게요"



년 전, 처음 스타벅스에 갔을 때는 커피를 가져다 마시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가져다준다고 하니 더 어색했다. 아주머니는 닦던 컵을 한참 동안 더 닦은 이후에야 차를 가져다주었다. 창가에 앉아 차를 코에 가져다 대자 봄의 향과 차향이 왈츠를 추고 있었다. 코 끝이 간지러웠다.  



그는 "사장님은 어떻게 저렇게 바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분명 젊은 시절 쉬지도 못하고 일하며 빡빡 모은 돈으로 시골에 와서 유유자적하는 것이리라고, 혹은 물려받은 게 많아서 원래부터 저렇게 여유가 있었나 보다고 상상도 해보았다. 여유의 태생은 다르겠으나, 그도 카페에 맞게 여유를 좀 부리는 '척'을 해보았다.  



하지만 정말 부자와 명품을 하나 걸친 평민이 구별되듯, 그는 사장의 여유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벽에 걸려있어야 할 시계가 없는 것에서부터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해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있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그가 여유로운 척하는 표정에 구정물을 끼얹었다. 그가 손톱을 물어뜯고 싶어질 것 같다고 느끼던 찰나, 사장이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부모님이 보시면 속상하시겠다. 얼굴이 상했네요, 이것 좀 드셔보세요."  



접시에 담긴 것은 직접 만든 홍삼절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는 씁쓸하고 단 절편을 씹으며 '참 인생 같은 맛'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이 쓰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곱씹었다. 가족을 위해서, 또 직장을 위해서- 그 밖에 것들은 모두 포기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에게 행복감을 주는 것 또한 그가 집중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직장에서의 인정과 승진, 가족과의 따듯한 시간들- 어떤 이들에게는 가져본 적 없는 것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그에게 너무도 쉽고 편하게 많은 업무를 맡겼던 상사들이 결론적으로는 그를 지금의 자리까지 올려놓았다. 바쁘고 버거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삼켜낸 덕에 많이 배웠다. 특별히 잘 나가는 직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디 가서 빠지는 경우도 없었다. 어느 경우건 둘째 줄-셋째 줄 어딘가엔 그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가족들도 특별히 좋은 집에 살며 좋은 옷을 걸치지는 못했으나, 큰 병도 탈도 없이 꼭 필요한 건 다 갖춰가며 살고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네 명이나 되는 아이를 얻은 것도, 그 아이들이 어떻게든 빨리 퇴근하려는 아빠를 이해해 주고 좋아하는 것도 복 받은 일이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고된 저녁마다 아이들 웃음이 연못에 개구리밥처럼 채워져 나갔다.  



코로나도 한 번을 안 걸려서 오늘 이렇게 코로나 핑계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도- 자유로를 신나게 달려볼 수 있었던 것도- 운도 좋게 이런 향긋한 카페를 만난 것도- 꽤 나이스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홍삼 절편이 끝맛만 남기고 목구멍 너머로 기어들어갔다. 해가 지고 있는 것 같아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폈지만, 시계는 그 자리에 없었다.   



마침 주인은 카페 바에 불을 끄며, 이제 집에 갈 시간이라고 했다. 밤엔 날씨가 으쓱하니까 단추를 잘 채우고 돌아가라는 말도 붙였다. 그렇다. 단추를 채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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