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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Jan 27. 2023

부어라 마셔라. 살고 싶다면.

내가 그토록 마시는 이유-



활동이  사라진 지 4개월이 지났다. 고인 돌에 이끼가 끼듯 옆구리에 살이 불어나고 활력이 떨어진다. 더 자주 피곤을 느끼는 것 같다. 점점 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젠 전형적인 40대의 아저씨를 향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혹시 머리털 마저 줄어든다면 완벽하다,


영관장교부터는 보험료가 싸진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야외 활동이 줄어들다 보니 부상의 위험이 줄어드는 것을 보험료 산정에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정적인 생활양식으로 인해 증가하는 각종 질병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몸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늦게 퇴근하는 생활이 계속되고, 연장된 근무시간 중에 95%는 컴퓨터와 샅바를 잡고 있다. 술이라도 마신다면 회식을 위해 칼퇴근을 할 텐데, 담배라도 피우면 한 시간에 한 번은 일어나 기지개를 켤 텐데-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나에게 그런 기회는 없다. 그런 건.


한 시간에 한 번씩 담배를 태우러 가는 동료들 등에 내 마음을 태워 보내지만,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열심히 전투를 지르고 있다. 이 시대에 진정한 키보드 워리어다. 담배라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수십 번은 해본 것 같다.

 

살 길은 알아서 찾는다고, 나름의 해법으로 찾은 것은 '마시기'다. 술은 끊었고, 술 외에 모든 것을 마시는 중이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기 전부터 물을 올린다. 커피머신에 전원을 올리고,  무엇을 마실지 고민하며 컴퓨터 로그인을 한다.  


하나 둘 사모은 티백과 캡슐들이 내 자리 뒤 책장에 "2오 횡대 해쳐 모여-"를 외치며 가지런히 도열해 있다. 특별히 순서는 없다. 그저 직전에 마시지 않았던 무언가를 집어 들어 차를 내린다. 그렇게 하루의 시작을 '마시기'로 시작한다.


마시기 시작하면 금세 다 마셔버리는 것이 한 잔이다. 한 잔을 마치면 두 잔을, 그리고 세 잔을 연거푸 마시며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린다. 문서 하나에 차 한 잔 정도, 회의 한 번에 차 한 잔 정도- 마시다 보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 탕비실과 화장실이다. 탕비실까지 15걸음, 화장실까지 32걸음을 걷는 것으로 오늘의 운동량을 채운다.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마시기를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끝이 난다. 의자에 파묻혀, 자판에 떠밀려 끝날 뻔 한 하루가 그래도 1000보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살기 위해 마셨던 하루가 지나고 퇴근시간이 다가온다. 아내에게 안부를 물을 겸 전화를 걸어 아내의 상태를 확인한다. 야근의 가능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아내가 너무 힘들어하면 우선 다 접고 퇴근, 아내 목소리에 활기가 있으면 차 한잔 더 내리고 야근이다. 퇴근을 하든- 야근을 하든 이때부터는 카페인 섭취를 목적으로 차를 마신다. 주로 커피다. 사실 낮에는 활력으로 일을 할 수 있지만, 저녁부터는 카페인으로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특히 퇴근하기 전에는 에너지 드링크를 한 캔 마시고 가는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1800시-2200시, 하루의 최대 고비이자 결정적 작전이 이뤄지는 시간이다. 네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먹이고 씻기고 재우기를 하는 시간이다. 에너지 드링크가 간절한 시간이다.


집에 있는 전등들이 하나둘씩 꺼지고, 아이들이 셋넷 씩 잠든다. 아직도 마시기는 끝나지 않았다. 남은 집안일과 내일 아침 아이들 등원준비를 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예전 같으면 맥주라도 한 캔 마시면서 하겠는데 술을 끊고 한 참을 방황했다. 이 저녁시간에 과연 무얼 마셔야 할까.

 

결국 예전에 그 기억을 잊지 못하고 돌고 돌아 무알콜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알콜 한 방울 들지 않은 그 맥주를 따서 마시며 "크~" 하고 추임새를 붙여본다. 알콜이 들어있는 것만 같다. 하루의 마무리를 정갈하게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화장실에 한두 번 더 가보아야 할 것 같다. 이렇게 계속 마시고 부어야만 살 것 같다.


녹차부터 커피까지, 에너지드링크부터 무알콜 맥주까지.

내가 그토록 마시는 이유.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

출처 : 티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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