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로 살면서, 혹은 첫째로 살면서
어려움을 뚫어내면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책임은 얼마나 무거운지, 그 가운데 나는 얼마나 무력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도전하고 부딪치고 그러다 성공한 몇 가지가 다행스럽게 오늘로 이어졌다.
하지만 학습된 무력감이라는 것은 어린 코끼리 다리에 족쇄나 뚜껑 달린 병 속에 빈대에게 처럼 한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왕 앞에 올라오는 상소문들처럼 줄지어있지만, 그중에서 도전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별로 없다.
이제는 정확히 알고 있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나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 얼마나 흔한지. 나보다 가진 것 많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앞서나가고 있는지. 어쩌면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알고 있다.
나는 평균 이하의 상황과 능력에서 평균 이상의 자신감으로 살면서 간신히 간신히 중간정도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37년 6개월의 삶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잡아당겨도 꿈쩍하지 않는 족쇄처럼, 아무리 부딪쳐도 열리지 않는 병뚜껑처럼 학습하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부족하고 게으르지만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가족에 집중하고 내가 가진 욕구를 희생하는 정도, 딱 그 정도.
아내가 유난히 갈치를 많이 구운 오늘 저녁, 식사를 시작하고 20분 동안 갈치살을 발라 네 명의 아이들 밥 위에 얹어주고, 배가 부른 아이들 입에서 그만 먹겠다는 소리와 함께 덩그러니 놓인 두툼한 갈치 한 도막.
아내의 강권에 남은 갈치토막을 닭다리를 뜯듯 물어 입안 가득 갈치살을 채우니, "아, 이게 갈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선뼈에 붙은 조각 말고 살 덩어리가 주는 만족감이 꽤나 좋았다. 아이들 키우면서 언제나처럼 "아빠는 안 먹어도 된다. 안 좋아한다. 많이 먹었다."라는 말을 달고 사는데
언젠가부터 첫째 아이는 그런 아내와 나를 배웠나 보다.
항상 풍족하지 않은 먹을 것과. 놀 것과. 입을 것. (그렇다고 빈곤하다는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운데서 첫째는 자신은 괜찮다며, 안 먹고 싶다며, 아니라며 동생들에게 양보를 한다.
가여운 마음에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려고 해 보아도, 엄마아빠가 완고하게 거절하는 것까지도 그대로 배웠나 보다. 이 아이의 8년 6개월은 나의 어린 시절보다 훨씬 더 나눠야 하고 나눌 수밖에 없는 삶이었던지. 그런 첫째를 보는 나의 마음은 전투화에 들러붙은 진흙처럼 묵직했다.
녀석이 동생들을 알뜰히 살뜰히 챙기고 양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건 잘못된 행동은 아니지만 (혹은 오히려 멋진 모습이지만) 충분히 공급하지 못한 나의 잘못인지를 반추하게 되기도 하고, 파이는 정해져 있는데 너무 많은 조각으로 나눌 수밖에 없도록 한 나의 잘못인지를 재반추하게 되기도 한다.
이 녀석들이 무섭게 먹어치우는 샤인머스켓이 좀 싸져서 한 시름 놓았지만, 무섭긴 하다. 더 벌어야겠다는 다짐과 그래봤자 내 월급은 정해져 있다고 하는 병뚜껑 사이에서 열심히 점프하는 벼룩같이- 무기력을 학습했으나 아직까지 이상주의적 만행을 이어가고 있는 나를 응원하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