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주차를 하고 집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내가 사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가 내려오고 있었다. "옆집인가?"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니 아내가 걸어 나왔다. 표정은 좋지 않았다. 어디 가냐 물으니 도저히 아이들하고 있을 수 없어 잠깐 나간다 했다.아내 혼자 감당해 온 시간이 가득 찼으니 잠시 비우러 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아이들이 대단히 말을 안 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아내를 보내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니 비교적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첫째와 둘째가 쪼로로 달려 나와 '엄마가 나갔다'는 것과 '동생들이 말썽을 피웠다'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끝도 없이 했다.
셋째 넷째를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보려 했지만, 이 녀석들도 혼날 것을 감지했는지 한 녀석은 딴청을 피우고, 다른 한 녀석은 침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가버린다.
"얼른 와라. 안 오면 혼난다."
낮은 목소리로 여러 번 반복하니 혼날게 미리 무서워 울면서 나온다. 간신히 내 앞으로 불려 나온 아이들에게 무슨 말썽을 부렸는지 물었다. 셋째 넷째는 당황해서 더유창하지 않은 한국어에 손짓 발짓 섞어가며 뭔가 설명하지만 잘은 모르겠다.
우선 사태수습을 위해 네 명의 아이들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나도 서둘러 집을 치운다. 아이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병정들처럼 맡은 바 임무를 잘도 수행한다. 동시에 나는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쉬다 와, 추우니까 카페엘 가든가 차에 들어가 있든가-
집이 대충 정리되고, 씻지 않은 아이를 씻기고 주방을 보니 아내가 저녁준비를 하다 만 식재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채 썰어 볶은 당근. 썰어놓은 양파, 멸치볶음, 핏물 빼는 중인 고기, 누룽밥 등등. 아내로 빙의해서 무얼 만드는 중이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정답에 도달하지 못했다.
보이는 모든 재료를 후라이팬에 넣고 기름을 둘렀다. 노릇하게 볶아 놓으니 뭐 그런대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그냥 먹기엔 좀 허전해 보여 계란 후라이를 만드는데, 이제 더 혼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셋째 넷째가 쪼르르 달려와 끊임없이 참견한다.
"아빠가 요리하는 거예요?"
"계란으로 뭐 하는 거예요?"
"우와 맛있겠다"
"저도 해볼래요"
기름 튀니 뒤로 물러서라고 해도 미어캣 마냥 고개를 빼고 혀 짧은 소리로 계란후라이에 참견을 한다.
"저는 안 익은 거 못 먹어요"
"저는 동그랗게 만들어주세요"
"계란후라이 뜨겁겠다"
"소금 많이 뿌려주세요"
무서운 얼굴로 물러서라고 말을 하려는데 계속 웃음이 삐집고 나왔다. 이 녀석들이 너무나도 귀여운걸 어찌할까. 나로선 이들의 귀여움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다시 '근엄'을 차리고, 식탁에 가서 밥 먹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녀석들은 또 쪼르르 가서는 그 사이를 못 참고 티격태격한다.
"내가 기린 포크 할 거야"
"아냐 내가 먼저 가져왔어"
간신히 붙들어놓은 '근엄'모드로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마저 저녁을 차리는데 요실금 같은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저녁이 다 되고 식탁으로 불러 모아 볶음밥과 샐러드를 나눠주며 이야기했다.
엄마는 충분히 힘드니 도와줘야 한다. 대단한 걸 요구하는 건 아니다. 자기가 가지고 논 장난감 치우고, 씻으라고 하면 씻고, 시끄럽게 소리치지 않는 정도라고 했다. 엄마는 오늘 안 들어올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혹시 들어오더라도 다음번에 또 이러면 엄마가 영영 안 돌아오실 수도 있다고 겁을 한 숟가락 떠먹여 줬다.
걱정이 많아진 아이들에게 돌아다니지 말고 얌전히 밥을 먹으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제 자리를 지키며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었을 때쯤, 아내가 들어왔다. 아이들은 쪼르르 달려 나가 '엄마 죄송해요'를 연발했다. 아내도 '근엄'을 지키며 바로 목욕을 하러 들어갔지만, 내 생각에 아내도 이 녀석들의 귀여움에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잘 키우는 것도 물론이고, 잘 못 키우더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나의 중요한 무언가와 교환해야 하는 큰 기회비용을 요구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여정에서 다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매서운 한겨울에 붕어빵 같은, 푹푹 찌는 한여름에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나에게 맡겨진 이 아이들 잘 키워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도 들지만, 나의 어떤 책임이나 행위와 별개로 아이들은 성실히 또 꾸준히기쁨을 준다. 물론 다른 것들도 많이 주지만, 확실히 기쁨을 준다.
우리 집에서는 나만 잘하면 된다. 늘 잘못하고 부족한 건 나고.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놀고(어지르고), 먹고(많이 먹고), 자고(놀고 싶어 잘 안 자기도 하고), 존재한다(기쁨을 준다). 아이들이 내게 주는 모든 것은 감사로 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문제인 것이다.(문제가 많다)
어지르는 것, 부수는 것, 혹은 부서지는 것, 시끄러운 것, 아픈 것 모두 나의 몫이고 내가 가르치거나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족족 모두 기쁨이다.
하루하루는 전쟁이지만, 전리품은 기쁨인 일상. 그것이 나와 아내의 특별한 인생. 늘 감사해야 할 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