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다섯째는 '열음(여름)'이라 이름 지었다.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길에 별 다른 이견 없이 결정할 수 있는 마음에 드는 태명이었다.
아이를 만날 시기가 여름이었고,
닫힌 줄 알았던 태의 문을 다시 열음(Open)이었고,
우리 사랑의 과실이 열음(Bear)이었고,
이 아이가 자라 '열방에 복음'을 전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앞선 네 아이를 큰 탈 없이 낳았기에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당연히 힘들겠지만 평소보다 조금만 더 신경 쓰고 아끼면 된다고 생각했다. 퇴근시간을 조금 더 앞당겼고, 가사 참여를 조금 더 높였다. 일은 퇴근시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 더 이른 아침을 깨웠다. 동생이 생긴다는 소식에 아이들도 기쁜 마음으로 나와 아내를 도왔다.
다섯째를 갖는다는 건 참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가보지 않은 길이었고, 언젠가 가보고 싶은 길이었다.
아내와 상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집의 구조와 가구의 배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하면 침대를 하나 더 놓을 수 있을지- 차는 뭐로 바꿀지- 소득과 지출은 어떻게 다시 조정할지- 이런 주제들은 해답이 요원해 보였지만 고민만으로도 즐거운 문제들이었다. 아내는 철없는 내가 차바꿀 생각에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했으나 본인도 여러 방면으로 일곱 식구를 감당할 차를 알아보곤 했다.
막내딸의 친구가 되어줄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내도 여동생이었으면 좋겠다며 재미있는 상상들을 풀어내곤 했다. 애초에 딸이 하나 더 갖고 싶다는 아내의 의견이 반영된 계획임신이었다. 만약 딸이라면 아들 셋과 딸 둘이라는, 서로에게 멋진 조합이 될 것 같았다. 여름이 지나고 작아진 막내딸의 옷들을 지인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다시 모아 정리했다. 3년쯤 뒤엔 다시 꺼내볼 수 있을 것이었다.
올해 여름은 좀 이상했다. 너무 더웠고, 태풍은 오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인가 싶다가도 한 낮엔 푹푹 찌는 더위에 반팔을 꺼내야 했다. 뭔가 좀 이상했다.
다시 한번 아이를 만나러 갈 때가 되었지만 좀처럼 시간이 나지 않았고, 갔었던 병원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운 병원을 알아보고 새로운 시간을 잡는데 예상보다 수일이 더 걸려 거의 한 달 만에 아내 혼자 산부인과에 가게 되었다. 이미 경험은 많았고, 며칠 늦게 간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아내는 몸이 좋지 않은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이들이 또 아내를 힘들게 해서 아내가 많이 지쳤겠거니 짐작하며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너희들 왜 엄마 말 안 들어서 엄마 또 화나게 만들었어."
"아니에요, 엄마 화 안 나셨어요. 저희 엄마 말 잘 듣고 장난감도 잘 정리하고 있었어요."
돌아보니 집에 평소보다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침실로 가 아내 발치에 앉아 말을 걸었다. 어둑했지만 충혈된 눈이 보였다. 아내는 좀 피곤하다고 했다.
서둘러 저녁을 차리고 아이들을 먹였다. 아이들이 다 먹고 나니 아내가 식탁으로 나왔다. 배가 고픈지 수저를 들었으나 많이 먹지 않았다. 물으니 점심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 또 병원은 잘 다녀왔는지 물으니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이가 안 컸더라고"
당장 아이가 안 컸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며 잠시.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뭔가 잘 못 들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리어, 뭔가 아직까지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묵직한 대답을 찾아 질문이 입을 나섰다.
"주수보다 좀 덜 컸대?"
아내는 아이가 지난번 봤을 때보다 별로 더 크지 않았다며, 심장소리를 듣지 못하고 왔다고 했다. 분명 문장은 이해가 됐지만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게 내가 위로를 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니면 그냥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이니 별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넘겨받아야 하는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허나 아내를 보니, 아내는 직감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깊은 새벽, 자다가 목이 말라 물 마시러 나온 둘째가 기도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아빠, 공부하세요? 열심히 하세요~"
열심히 기도를 했으나 언제나처럼 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게 아니라고,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열방에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이 아이를 당신 뜻대로 사용하시라고 서원했지만. 역시 답은, 언제나처럼 오지 않았다.
휴가를 내고 이 병원 저 병원 가보았으나 아이의 심장은 어디에서도 뛰지 않았고, 그걸 확인할 때마다 내 심장은 낮게 내려앉았다. 이제는 거울 속 나에게 악수를 내밀듯 현실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여름을 보내며 아내와 나, 우리의 아이들에게 다시 채널을 맞춰야 하는 시간이었다.
가을 같은 가을이었다.
해가 짧아져 출퇴근 길에 가로수를 본 적이 없었는데, 병원 다녀오는 길에 보니 집 앞에도 볼만한 단풍이 들어있었다. 더운 줄만 알았는데 시간은 가고, 가을은 오고, 단풍은 들고, 낙엽은 지고, 그리고 가을도 가겠지.
"나, 여보하고 아이들 위해서 빨리 털고 현실로 돌아오려고"
악수를 받지 않는 나의 현실과 다르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받은 아내는 이 모든 이해 안 되는 상황들을 감사로 규정지으며 며칠 사이에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물론 눈물은 흐르고 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건강한 네 명의 아이가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아내 말이 맞다. 휴가도 낼 수 있고 병원도 갈 수 있고 약도 지을 수 있는.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감사할 거리들이 있었다. 감사한 일은 많았다. 다만 나는 감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도 노력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고통은 느껴야 될 것 같아서"
배가 뒤틀리는 고통이 이어졌으나 아내는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어미가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은 감사로 규정지은 현실 속에서도 먹먹한 일이었다. 아내에게 유독 짧은 여름이었다.
동생 생긴다는 소식에 들떴던 아이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애도를 하고 있었다.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서툴지만, 아이들도 열심히 엄마를 위로하고 기도하고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여보는 여보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기억해 줘"
이런 일을 어떻게 글로 옮길까 엄두도 못 내고 있던 나에게 펜을 쥐어준 건 아내였다. 지난 며칠간 가족들을 재우고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며 깨어있었다. 베개에 머리를 대어도 피로 너머의 무언가가 뒷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높이 세워졌다 무너졌다 이제 다시 정돈해야 하는 부서진 적벽돌 같은 마음을. 그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떤 걸 써야 할지, 얼마나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판에 손을 얹었다. 얹었으니 글은 나왔고. 우리의 여름이 충분히 기억될 만큼 잘 쓰였는지 모르겠으나 깊은 곳에서 꺼낸 진짜를 썼다.
어쩌면 내년 여름에 만났을지도 모르는 다섯째를 보내며.
아직 왜 주셨다가 데려가셨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범사에 감사하자고 하는 아내를 보며.
심장이 멈추면 언제든지 갈 곳과, 나보다 먼저 간 자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