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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Nov 10. 2024

나는 좀 천천히 걷고 싶은 편

조금 지쳤을 때 드는 생각


1. 걸을 일이 생긴다면 그냥 좀 천천히 걷고 싶은 편


일찍 시작한 하루는 길고 빠르다.

일상은 늘상 분주하고, 전화와 메시지는 쉴틈 없다.

하루가 어떻게 시작해서 끝나는지 모르겠다.

한 해는 어떻게 시작하고 끝나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올려다보는 하늘은 대체로 파랗고,

분홍 꽃이 올라왔다가, 초록 잎이 올라왔다가,

주황 감이 열렸다가, 노란 모과가 열렸다가,

빨간 낙엽이 떨어지고, 검은 가지가 남았다.


이번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더 바쁘게 움직이는 선배들을 보면서,

저렇게 되어야 저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면서,

저게 나의 미래가 될 것 같다는 회색빛 생각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전투적으로 밥을 먹으러 가고,

전투적으로 밥을 먹고,

전투적으로 이를 닦고,

전투적으로 식후 산책을 하고,

전투적으로 쉬다가,

전투적으로 업무에 복귀하는 이들을 보면서,


난 그냥 좀 천천히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팀원들끼리 밥을 같이 먹는 것까지는 오케이.

하지만 산책만큼은 그냥 좀 좋아하는 노래도 들으면서

내 다리길이에 맞는 보폭과,

내 심장박동에 맞는 보속과,

내 정신건강에 맞는 리듬으로 ,

그냥 좀 천천히 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굳이 지금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그냥 조금 조용히 있고 싶은 편


어색한 침묵이 나라고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별로 섞고 싶지 않은 감 같이

별로 섞고 싶지 않은 대화도 있는 법이다


어떻게든 집에 일찍 돌아가서

가족들을 돌보고 나도 좀 쉬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그러려면 얼른 쌓인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누군가는 

혀에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듣고

또 사회적 지능을 발휘해 적당한 호응을 하고

사금채취하듯 필요한 정보를 골라내고

그러다 중요한 것들을 활용을 해야 하겠지-만


말을 하거나 듣거나 하는 과정은

더군다나 주도권도 주장권도 없는 상태에서의 대화는

에너지의 충전보다는 방전을 유발한다


내가 수영, 특히 다이빙을 좋아하는 건

물속에선 아무리 시끄러운 소리도 먹먹해진다는 것

특수한 무전기가 아니라면

눈빛과 손짓으로만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세상 조용하다는 것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도 마찬가지다

네 명의 아이들은 제각기 할 말을 한다

대화엔 자신과 아빠만 있다는 듯

아빠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듯

동시에 마구마구 할 말을 쏟아낸다

물론 행복한 일상이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아빤 이미 하루에 들을 청취량을 모두 소비했단다

아이들아 미안하다 그래서, 그래서

너무 지쳐 아이들에게 티브이 볼 시간을 준다면

네 명의 아이들은 각자의 취미에 맞게

각기 다른 미디어를 소비한다

태블릿과 핸드폰에서 많은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나는 그 지독한 소음에

배탈이 날 지경이다.


굳이 당장 나에게 해야 하는 말이 아니라면 멈춰주세요

웬만하면 조용히 좀 있고 싶은 편.



3. 어차피 먹을 거라면 조금 천천히 먹고 싶은 편


아이들과 밥을 먹으면

분명 몇 년째 식탁예절을 가르치는데도 불구하고

밥알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옆에 코로 들어가는지

코 옆에 귀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식당엘 가면 음식을 잘라주고 덜어주고

흘린 음식과, 쏟은 물컵과, 묻은 입가를 닦아주고

매우면 맵다고, 밥 먹다 화장실 급하다고,

먹는데 덥다고, 이 반찬 싫다고

끝없이 이어지는 요구의 정글을 헤치고


어떻게든 아내가 편히 먹을 수 있도록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하면서

가급적이면 식탁에서 오래 체류하지 않기 위해선


나라도 밥을 빨리 먹어야 한다

굳이 이렇게 먹어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먹어야 힘이 나고,

힘이 나야 제 역할을 해내고,

그래야 이 가정이 굴러간다는 것을

안다. 아버지가 된 나는.


그러니 항상 먹고 난 뒤엔 체기가 올라온다


부대에선 좀 천천히 먹고 싶지만

전투적인 식사시간은

전투적인 휴식시간의 확보를 위한 선행 조건이기에

전투적인 속도로 수저를 움직인다.

식판에서 입으로 에너지원을 이동시킨다.

빠르게, 많이. 빠르게.


그러니 항상 먹고 난 뒤엔 체기가 올라온다


어차피 먹을 음식이라면,

에너지뿐만 아니라 맛과 향을 가지고 있는 음식이라면,

가급적 좀 천천히 먹고 싶은 편이다.

기회가 된다면.


음식의 식감도 좀 느껴보고

음식의 향과, 익힘 정도와, 이븐 한 정도와,

음식의 킥과, 색감과, 의도와, 의도의 전달과,

뭐 이런 것들을 나도 좀 느끼면서

가급적이면 좀 천천히 먹고 싶은 편이다.



4. 전쟁 난 게 아니라면 그냥 내일 낮에 연락하고 싶은 편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너가 왜 이 시간에 문자를 한 건지

아니 문자를 하는 너는 좀 그래도 나은 편

그는 왜 문자 말고 전화를 하는지


내가 한참이나 우는 핸드폰을 보며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는 건


'이게 전쟁이 났다고 알리는 전화일까 아닐까.'라는 고민 때문이란다. 사실.


너는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는지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겠지

군인이라면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전화가 울린다면 즉각 받아야 하는 건 아니냐고


응 맞지. 너의 말이 맞지.

아내는 전자파 나온다고 늘 뭐라 하지만

내 머리맡엔 항상 핸드폰이 있지.

손목이나 어깨가 비틀리지 않고

그냥 딱 뻗으면 잡히는 곳에 핸드폰이 있지.


한 번만 울려도 알아.

전화가 울리는 걸.


하지만 즉시 받지 않는 건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게 전쟁이 났다는 건지, 아님 그냥 너가 나를 조금 덜 배려하는 건지.

그걸 생각하느라 그러는 거야.


전쟁이 아니라면 그냥 내일 낮에 평온한 벨소리와 평범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안부를 물으면서 통화하고 싶은 편이야.

한밤중에 용건부터 꺼내는 전화 말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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