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순수함

교회 공동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by 게츠비

오늘 교회 청년 공동체에서 예배 후 가정 모임을 가졌다. 일주일간의 삶을 나누고, 예배에서 받은 말씀을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시간이었다. 청년 공동체의 규모는 약 150명. 각 가정별로 리더가 있으며, 10명 내외의 인원이 한 그룹을 이룬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10명의 이야기가 오간다. 짧지만 긴, 길지만 짧은 시간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삶과 내면을 제한된 시간 안에 꾹꾹 눌러 담아 나누어야 한다. 감정과 기억을 압축해 10분 안에 풀어놓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듣는다. 하지만 정말 듣고 있는 걸까?


마치 공장 기계 부품처럼, 우리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양만큼의 이야기, 정해진 순서대로 흐르는 대화. 찰리 채플린이 산업 시대를 풍자했던 것처럼, 우리의 예배 후 나눔 자리도 그와 다르지 않다. 형식적이다. 기계적이다. 의미를 담으려 하지만, 결국 흐름에 떠밀려간다.


그리고 또 흩어진다. 일주일 후 다시 모이고, 똑같이 반복한다.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에 가는 이유는 단순히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온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교회는 누군가에게는 회복의 자리, 누군가에게는 회개의 자리, 누군가에게는 훈련의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본질이다.


본질을 잃었다. 우리는 그저 기계의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물론, 가끔은 다르다. 두세 달에 한 번씩이라도 함께 모여 깊이 교제할 기회를 가진다. 그래서 그 시간은 더 소중하다. 우리는 깊은 관계를 갈망한다. 단순히 신앙인의 타이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원한다면,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신앙의 본질은 관계이고, 그 관계의 뿌리는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데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공허하다.


예배와 나눔의 자리 이후, 공허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듣는 사람이다. 성경은 “말할 때가 있고 잠잠할 때가 있다”(전도서 3:7)고 말씀한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공허함이 누군가의 회복으로 이어진다면, 그 공허함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의 공허함은 누가 해결해 주는가?


우리는 다시 그 공허함을 타인에게 쏟아낸다. 그리고 그 타인은 다시 공허해진다. 끝없는 순환. 서로를 채워주려 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관계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공허를 되물린다. 이 관계가 정말 건강한 것인가? 정말 이렇게 되는 것이 맞는가?


오늘 나눔 후, 평소 깊은 이야기를 나누던 형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다. 항상 있는 이벤트가 아니었기에, 내가 묻기도 전에 형이 말했다.

“고민 있어 보인다.”

그럴 만했다. 나눔의 자리에서 우리는 100% 솔직할 수 없었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 나를 압축해 전해야 했고, 서로 경계하는 분위기 속에서 쉽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형과의 대화는 새로웠다.


일전에 가정 모임에서 나눈 나의 이야기 중 네 가지의 고민이 있었다. 그러나 두 가지는 모두에게 나눴지만, 두 가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말하지 못한 것들이 결국 형의 관심을 끌었고, 자연스레 깊이 있는 대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대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신앙 공동체 내에서의 정치적·신념적 갈등에 대한 이야기. 서울의 대형교회들에서 벌어지는 현실. 정치적 중립을 선언해도, 좌든 우든 어느 편을 선택해도 욕을 먹는 현실. 신앙은 본질을 지켜야 하지만, 우리는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형은 오랫동안 고민했지만, 확신을 찾지 못했다.


한 목사님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누군가는 우상숭배의 죄를, 누군가는 교만의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도를 걸어야 한다.”

그러나 중도를 걸었던 목사님조차 욕을 먹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교인이라면 반드시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누군가의 고민 덕분에 우리는 신앙을 누리고 있었고, 누군가의 갈등 속에서 우리는 평안을 얻고 있었다. 고민하는 존재였어야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제는 나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우리의 공동체 이야기로 돌아왔다.


쳇바퀴 같은 나눔 속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우리뿐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모두가 느끼는 이 공허함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그 해답은 결국 "소수의 만남"이었다.


일대일로 마주 앉아 깊이 나눌 수 있다면, 상처받은 영혼, 차마 말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형제와 자매가 단둘이 만나는 것은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전통적인 교리 안에서는 피해야 할 관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신앙 안에서의 성숙도 이루어진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며 깨달았다.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은 "순수함을 잃은 것"이다.


나이를 먹고, 신념이 굳어지면서 우리는 점점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만의 색을 지키기 위해, 비슷한 색을 찾아 헤맨다. 어릴 적 신앙이 처음 우리 마음속에 들어왔을 때, 그 순수함을 우리는 여전히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순수함을 잃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우리의 논리를 내려놓는다면 우리는 본질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첫걸음은 무엇일까? 우리는 다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우고, 그분의 뜻을 구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더 이상 타인을 내 기준에 맞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곳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심. 그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함을 되찾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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