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공공성

복음의공공성(저.김근주)을 읽고

by 게츠비

복음을 우리는 종종 신약의 이야기로만 제한해서 이해하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복음의 시작을 창세기부터 짚어낸다. 구약은 신약의 배경 정도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복음이다. 이 말은 곧, 신앙은 단지 개인의 구원이나 위안이 아니라, 공동체적 의미 안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 역시 과거엔 신앙을 철저히 나 자신의 위로와 성장 수단으로만 받아들였고, 말씀을 삶에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만 적용했다. 그러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복음의 공공성’이다. 말씀은 나를 넘어서 ‘우리’를 말하며, 이 ‘우리됨’의 핵심은 공동체를 향한 복음의 성격, 곧 공공성에 있다.


우리는 원래 공동체로 창조된 존재다. 말씀은 그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도록, 약자가 배제되지 않도록 기능해야 한다. 이 점에서 복음의 공공성은 단순한 평등이나 공정이 아니라, 연약한 자를 위한 집중적 구조다. 세상의 공공이 다수를 위한 질서라면, 성경의 공공은 소수를 위한 헌신이다. 세상의 공공재, 예를 들면 가로등이나 도서관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모두’가 아닌 ‘약자’를 우선으로 놓는다. 가령 장애인, 여성, 어린아이 같은 이들이 거리와 건물, 복지 안에서 먼저 배려받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공공의 시작점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세상은 약자를 비용으로 계산한다. 생산성이 낮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배제하고, 그들을 위한 공공은 경제성 논리에서 밀려난다. 결국 약자는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배려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복음은 이 구조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복음은 약자를 위해 있는 것이고, 강한 자가 약자를 먼저 고려할 때 진짜 공공이 시작된다. 공공은 균등 분배가 아니라, 불균형한 곳을 먼저 메우는 쪽으로 향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 공공이다.


여기서 한 가지 본질적 질문이 따라온다. 왜 우리는 약자를 배려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항상 자신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그 이유는 바로,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는 그 이기성을 포장하며 살아간다. “나는 부모를 잘 만났기에 감사해.” 이런 말조차도 마치 내가 그걸 선택한 것처럼 들린다. 태어남조차도 내 자격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아이를 낳았기에, 이 아이가 있는 것이다.” 결국 모든 행위가 자기 중심으로 회귀하게 되는 구조,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가? 하나님도 ‘모든 것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신다. 표면만 보면 이 역시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자기 중심의 결과를 책임지지 못한다. 타인을 위한 듯 하지만, 결국 자기를 위한 구조로 흘러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중심성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결과를 책임지신다. 심지어 그 책임이 십자가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기성은 선하다. 공공적이다. 사람을 살리는 이기성, 책임을 전제로 한 자기중심성은 ‘공공의 최고봉’이 된다.


우리는 이제 물어야 한다. 이 복음의 공공성을, 어떻게 우리 삶 안에 녹여낼 것인가? 지금 세상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다. 연약한 자들을 위한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하지만 그 공공성이 우리의 삶에 자리 잡는 순간, 이 땅은 따뜻한 세상으로 변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것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어떤 것을 ‘받고’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단지 주어진 것이다. 어떤 이는 좋은 부모를 만났고, 어떤 이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자신의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은혜 위에 있다.


복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복음이 공공성을 품지 못하면, 그것은 ‘사적 욕망의 도구’가 된다. 약자를 위하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말할 때, 반드시 연약한 자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삶을 고민하고, 구조를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복음이다.





Ch1. 자기중심성, 자기애


창세기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함으로써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했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이 장면에서 선악과는 단순히 금지된 열매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려 했다는 주권적 욕망의 상징으로 제시된다. 원래 선악은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기준을 하나님으로부터 가져와 자기 안에 세우려 했다. 뱀이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그 순간,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자신이 판단자가 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자기애가 시작된다. 인간은 이제 자기를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고, 선악의 판단 또한 자신의 입장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선악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되면서, 정의는 왜곡되고 공의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태어나게 되었다. 하나님 없는 자기중심성은 결국 타인을 위한 판단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판단을 낳는다. 이것은 곧 공공성의 파괴로 이어진다.


공공성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인간이 선악을 판단하고 질서를 세우려 할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자기애가 개입되고, 그로 인해 타자에 대한 배려는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만이 진정한 판단자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삶 속에서만 공공성은 유지되고 확장될 수 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이 스스로 통치자가 되는 순간, 그 공공성은 왜곡되고, 결국 무너진다. 그러므로 공공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Ch2. 죄의 시작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인간이 죄를 구체적으로 저지르기 시작한 지점이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나타났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간 사이의 관계 단절, 즉 사회적 질서의 붕괴를 보여준다. 이때 등장하는 ‘죄’는 단지 도덕적 일탈이나 내면적 잘못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파괴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죄는 질투, 분노, 이기심, 강압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며, 그 중심에는 항상 ‘자기 자신’이 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인간의 시도는 곧 선악의 기준을 자기가 쥐려는 욕망으로 이어졌고, 이 자기애는 타인을 짓밟는 형태의 죄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죄는 자기중심성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우선에 두고 타인을 판단하거나 이용하며, 그렇게 공동체적 공공성은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죄는 혼자 짓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타인을 향해 흘러나간다. 그래서 죄는 공공적인 영역을 침식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무너뜨린다.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도덕적 개선을 넘어서, 인간 안에 자리한 자기중심성과 죄의 본질을 먼저 직면해야 한다. ‘내가 주인이 된 삶’은 필연적으로 ‘죄가 통치하는 삶’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노아의 등장은 특별한 전환점이 된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며, 새로운 질서의 기반을 마련했다. 노아의 방주는 단지 생존을 위한 방편이 아니라,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질서 회복 프로젝트였다. 암수 한 쌍씩의 생명을 지키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방주는 하나님의 정의와 질서, 그리고 공공성이 다시 세상 가운데 세워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아는 단순히 의로운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공 질서를 회복하는 데 쓰임 받은 사람이다. 그의 순종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삶이었고, 공공성의 회복은 바로 그 삶 속에서 시작되었다.


Ch3.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주신 이유는 단지 그의 삶이 풍족해지기 위함이 아니었다. 저자는 말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부르셨고, 그 삶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 땅을, 그 삶을 함께할 존재로 자손을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철저히 공공성을 위한 복이었다. 복의 목적은 축적이 아니라 나눔이었고, 소유가 아니라 실천이었다. 그렇다면 정의와 공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정의와 공의의 반대는 이기적이고 사적인 삶이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나의 유익’, ‘나의 성취’, ‘나의 안전’은 정의와 공의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을 중심에 두지 않는 연습이고, 공공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태도다. 우리가 사사로운 것을 추구하는 한,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안에 온전히 드러날 수 없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며 그분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은, 결국 약자를 돌보고, 억눌린 자와 함께하며, 그들의 눈물을 보며 사는 삶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린다. 오늘날 사회는 겉으로는 공공성을 말하지만, 실상은 사익이 우선이다. 공공의 이름 아래 움직이는 시장은, 종종 소수의 상류층을 위한 구조로 작동하고, 다수의 희생을 요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의 이익’은 종종 위장된 언어이며, 약자는 숫자와 효율로만 평가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은 본래 정의와 공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땅을 부동산 투자와 고급 건축물의 이름으로 소유하려 한다. 그리고 그 행위조차 정당화된다. 자유 시장, 개인의 선택,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처럼 세상은 다수를 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강자 중심의 공공만이 존재한다. 약자를 위한 공공은 여전히 희귀하고, 때론 불편한 존재로 치부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자이며, 연약한 자들을 중심에 놓는 자라고. 그래서 복음의 공공성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고, 철학이 아니라 삶이다. 저자는 복음이 말하는 공공성의 끝자락에서 말한다. 약자를 돌보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삶이라고.



Ch4. 우리가 받은 것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받은 ‘달란트’가 바로 그 실천의 출발점일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 직분, 자리와 역할은 단지 개인의 성취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요셉의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다. 요셉은 고난의 시간을 지나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그 자리를 자신의 안락함을 위해 쓰지 않았다. 저자는 그가 총리로서 행한 일들을 주목한다. 요셉은 애굽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바라보며,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방식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사람들을 살리는 선택을 한다. 그것은 곧,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 사용한 행위였다.


요셉은 감옥에 있을 때조차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그는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되게 살았고, 결국 그 삶은 공의와 정의의 실현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려는 의지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삶의 시작점이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 하나가 더 있다. 세상 한복판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지만, 동시에 가장 쉽게 ‘사사로운 신앙’에 빠지기 쉬운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의 인정 욕구, 내 자존감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믿음은 있으나 중심이 여전히 '나'를 향해 있다면, 그것은 공적 신앙이 아니라 사적 신앙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중심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느냐이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달란트를 주셨고, 우리는 그 달란트를 세상 속에서 정의와 공의로 펼쳐야 한다. 우리의 재능, 시간, 직업, 신앙 그 모두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며, 특별히 연약한 자들을 향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은혜는 머무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흘러가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복음은 결코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받은 것을 공공을 위해 흘려보낼 때, 우리는 진짜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간다.




Ep. 복음의 경계에서


공공성을 추구한다는 말은 참으로 쉬운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공공과, 세상이 말하는 공공은 때때로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세상은 공공의 이익을 ‘대다수의 편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다수가 편하면 소수가 조금 불편해도 괜찮다는, 그런 식의 공공이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가? 복음이 말하는 공공성은 분명히 다르다. 그것은 소수, 곧 연약한 자를 우선으로 여기는 방향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마주하게 된다. 하나의 불편한 현실, 그리고 논쟁의 중심에 선 문제.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기독교계는 이 법안을 강하게 반대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성경이 동성 간의 관계를 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질문하게 된다.


“이 반대는, 정말 공의를 위한 것일까? 혹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또 다른 사사로움은 아닐까?”


성소수자들은 이 세상에서 소수자로 살아간다. 그들이 선택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지라도, 그로 인해 조롱당하고, 고립되고, 때로는 자살을 고민한다. 우리는 그 고통을 얼마나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그건 죄야”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상처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곁을 주지도 않고, 다가가지도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외면함으로 입장을 말하고 있다.


그건 공공성이 아니라, 사사로운 신앙일지도 모른다.


나는 교회가 세상에 조금 더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는 말은 아니다. 복음의 본질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복음의 공공성이란, 경계를 긋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계 너머에 있는 사람의 고통에 책임지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가 반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반대하는 것만으로 끝나선 안 된다.


우리는 이들을 위한 진심어린 지원과 돌봄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복음은 정의다. 동시에 긍휼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복음은 바로 그 위에 세워진 이야기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우리가 다시 복음의 공공성을 붙들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의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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