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 Jul 03. 2018

우리 함께라면

에스와티니 & 남아공


 이상하게도 하루 종일 일이 꼬이는 날이 있다. 보츠와나의 프랜시스타운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시 남아공으로 들어가던 날이 그런 날이었다.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하기도 하고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소요되는 시간을 감안해서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텐트를 정리하고 도시락을 싸서 출발했다. 보츠와나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척추와 같은 1번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달리는 차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야생동물의 천국 보츠와나에서는 언제 어디서 야생동물이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약간의 긴장을 가지고 운전을 해야 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남아공으로 넘어가는 국경을 향해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를 달렸을 무렵,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대형 트럭이 우리를 스쳐가면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튀기고 지나갔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부 고속도로와 같은 보츠와나 A1 도로. 하지만 차보다 동물이 더 많이 이용하는 듯.


"팍!!"

"앗. 깜짝이야!"

"어? 앞 유리가 깨졌네?"


 비록 콩알만큼 작은 돌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달리던 차의 앞유리에 흠집을 내기에는 충분했다. 순식간에 앞유리에는 500원짜리 크기 정도의 X자 모양 흠집이 생겨버렸다. 케이프타운에서 차를 렌트하면서 "설마 앞유리가 깨지는 일이 일어나겠어?" 하는 생각에 별로 비싸지도 않은 앞유리 보험을 들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내의 잔소리가 두려워서 보험에 그런 옵션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큰소리쳤지만, 차량 반납 시에 행여나 앞유리를 통째로 갈아야 한다며 바가지를 씌우지 않을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빨리 출발했더라면, 아니 중간에 잠깐 멈추지 않았더라면, 차속을 좀 더 느리게 달렸더라면... 작은 돌이 튀어 앞유리에 맞는 그 찰나의 순간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후회일 뿐,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짜증 나는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작은 흠집이었지만 볼 때마다 눈에 거슬렸다.


 앞유리의 갈라진 작은 금을 힐끔거리면서 한참을 달려 보츠와나-남아공 국경의 인근 마을에 도착했다. 지도에 의하면 국경 전 마지막 주유소가 있는 곳이었기에 그곳에서 남은 보츠와나 지폐를 다 사용하여 주유를 하기로 했다. 정확하게 가지고 있는 현금만큼만 주유하려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의사소통의 실수로 원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기름을 주유하면서 카드 결제를 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외진 곳 특히나 국경 근처에서는 혹시라도 카드 결제 시 문제가 발생하면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에 가능하면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딱 맞춰서 가지고 있던 현금이 떨어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 또다시 짜증이 났지만 일단 카드 결제를 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카드 결제 오류가 발생했다. 아무리 시도해도 결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여행자 한 명 지나지 않는 아프리카 오지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동양인이 쩔쩔매고 있자 여기저기서 검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에 둘러 쌓이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가지고 있는 모든 카드를 동원하여 시도해서 간신히 지불하고 잰걸음으로 빠져나왔다. 기분이 몹시도 찝찝했다. 나 만큼이나 아내의 얼굴에도 불편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주유소 만나기가 쉽지 않아서 보일 때마다 가득 채워야 했다.


 그런데 더 짜증 나는 상황은 남아공 국경에서 발생했다. 보츠와나 출국 수속을 받은 과정까지는 순탄했다. 여느 출국 심사가 그렇듯이 그냥 얼굴 한 번 쳐다보고 무심한 표정으로 찍어주는 출국 도장을 받아서 나오는 것으로 출국 절차는 끝이었다. 하지만 보츠와나와 남아공의 국경을 가르는 림포포강을 건너서 도착한 남아공 입국 사무소에서는 복잡한 절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에서 꽤 잘 사는 나라라서 인지 입국 심사가 까다로웠다. 차량으로 국경을 넘기에 차량에 관한 서류와 각종 도로 관련 세금을 납부해야 했고 아프리카 지역에 성행하는 풍토병을 옮겨온 게 아니라는 신체검사도 받아야 했다. 차 트렁크와 배낭 등을 열어 보여주며 짐 검사까지 마치고 나서야 입국 심사대에 설 수 있었다. 남아공에서 출발해서 나미비아와 짐바브웨, 보츠와나를 거쳐 다시 남아공으로 재입국하는 것이기에 쉽게 통과될 줄 알았는데 꽤 여러 가지를 묻더니 마침대 입국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권을 자세히 보니 나와 아내의 체류 만료 일자가 다르게 찍혀있었다. 각자 여권에 찍힌 기한에 의하면, 나는 한 달간 더 머물 수 있고, 아내는 일주일 안에 남아공을 떠나야 했다. 이미 찍혀버린 도장을 지울 수도 없고, 심사원에게 아무리 사정해도 막무가내로 그냥 나가라고만 했다. 국경을 지날 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대게는 돈을 요구하는 부패 공무원과 싸우는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여행 일정 자체에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했다.


보츠와나와 남아공의 국경


 사건을 배경은 이러했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은 30일간 무비자로 남아공에 체류가 가능하다. 하지만 30일이 넘는 경우, 잠시 다른 나라에 갔다 오는 것으로 비자를 갱신하는 일이 불가능하고 자신의 국적국을 갔다 와야만 다시 30일을 받을 수 있다. 재입국 만으로는 갱신이 되지 않기에 임시로 허가한 일주일의 체류기간 안에 출국하거나 정식으로 체류 비자를 받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가 받은 체류일이 적법한 결과였고, 오히려 나에게 입국 도장을 찍어준 직원이야말로 실수를 한 셈이었다. 꼼꼼하게 조사를 하지 않고 보통의 나라들처럼 국경을 넘어갔다 오면 당연히 다시 체류일이 리셋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이대로 일정을 정리하고 떠나려고 해도 렌터카를 반납하고 비행기를 타러 케이프타운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이 넘게 걸릴 것 같았다. 결국은 비용을 더 들이더라도 정식으로 비자를 연장하려고 우리나라의 주민센터나 구청의 역할을 하는 'Home Affairs'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우리가 머물던 오지 마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방문 서비스를 할 뿐이라서 큰 도시에 있는 사무실을 찾아가야 했고, 가는 곳마다 우리를 도울 수 없으니 더 큰 도시로 가보라는 말 뿐이었다. 일단은 렌터카와 항공권 일정 때문에라도 일주일 후의 출국은 힘들기에 남아공 영토 안에 있는 또다른 국가인 에스와티니나 레소토로 다시 출국 후 재입국을 시도하기로 했다.


우리나라의 주민센터와 같은 Home affairs. 정작 외국인의 비자 관련 업무는 담당하지 않아서 다시 다른 관공서를 찾아 나서야 했다.


 꼬여버린 일정 때문에 우리 부부는 종일 침울했고 가능하면 서로의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도록 주의했다. 일 년이 넘도록 여행을 했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사건들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전날 밤 아니 불과 아침에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새로운 여행지를 앞두고 설레고 들떠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금세 마음이 불편해졌고, 그러다 보니 기대에 가득 차 오렌지 빛깔 같았던 여행이 우중충한 잿빛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 찾아간 블라이드 리버 캐년에서 캠핑을 하며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별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모닥불에 마쉬멜로우를 구워 먹으면서도 사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마음이 불편해서 인지 매사가 무감각해지고 작은 일에도 쉽게 짜증이 났다. 국경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비한 이런저런 대안을 세워 놓기는 했지만, 그저 마음속의 불편함을 빨리 떨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블라이드 리버 캐년 다음으로 가려고 했었던 크루거 국립공원을 포기하고 곧바로 에스와티니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나미비아의 피쉬리버 캐년과 달리 녹색의 장엄한 전경의 블라이드 리버 캐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 부부에게 에스와티니(2018년 스와질란드에서 국명을 변경)는 전혀 존재감이 없는 곳이었다. 그저 남아공 동부에 섬처럼 쏙 들어앉은 작은 나라라고만 알고 있던 에스와티니를, 가장 가까운 국경이라는 이유로 즉흥적으로 가게 되다 보니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출발 전 캠핑장 직원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알려준 길은 하필이면 공사로 인해 차선을 통제하는 바람에 한참 동안을 길 위에 갇혀 있다가 아슬아슬한 시간에 에스와티니 국경을 통과했다. 그때부터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 국경에서 구한 지도 한 장만 가지고 에스와티니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해는 지고 사방은 어둑어둑해지는데 아무리 달려도 우리가 머물만한 숙소는 나오질 않았다. 그냥 눈 딱 감고 조금 비싼 숙박비를 지불하고 리조트에 머물 수도 있었지만, 지도 상의 작은 캠핑장 마크가 자꾸 눈에 밟혀 계속 가보기로 했다.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진 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Malolotja라는 자연보호 구역 내에 있는 캠핑장이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힘들게 도착했건만 입구부터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기만 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기부터 에스와티니 (스와질란드)
해 질 무렵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던 에스와티니 국경


 그때 공원 입구에 있는 사무실에서 어스름한 불빛이 보였다. 무서움도 잊은 채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더니 다행히도 공원 입구를 지키는 야간 당직자가 나왔다. 앳된 얼굴의 JJ라는 흑인 직원은 공원에 전력을 공급하는 설비에 문제가 생겨서 현재는 정전이라며 언제 복구될지 알 수 없으니 오늘은 돌아가라고 했다. 날이 너무 어둡기도 하고 더 이상 찾아갈 만 곳이 없었기에, 정전이라도 상관없으니 하루 밤만 지내고 갈 수 있게 캠핑장을 안내해달라고 하니 무척 곤란한 표정으로 방향을 알려주었다. 막상 캠핑장에 도착해보니 왜 그런 표정으로 안내해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야생동물 보호구역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캠핑장은 자동차 라이트를 끄면 바로 앞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야생동물 소리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도저히 텐트를 치고 잘 자신이 없었다. 다시 관리사무실로 돌아오니 마치 우리가 돌아올 줄 알았던 것처럼 JJ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며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결국 관리사무소에서 JJ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가 차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차에 누워 별을 보며 잠들었던 Malolotja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해가 뜬다.


 추운 날에 차에서 고생하지 말고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라는 JJ의 친절을 고사하고 공원 입구에 주차하고 의자를 젖히고 누웠다. 좁고 불편한 차에 누워 추위에 떨며 자야 하는 상황이 짜증이 날만도 했지만 이국 만리 낯선 땅에 이렇게 나란히 쭈그리고 있는 꼴에 피식 웃음이 났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는 상황에 나온 웃음이었지만 웃기 시작하니 이내 지금 상황이 재밌기도 하고 그나마 안전하게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제야 누워있는 차창밖으로 빽빽하기 들어찬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니 풀벌레 소리와 멀리 동물들의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이 웃을 수도 짜증낼 수도 감탄할 수도 한탄할 수도 없는 상황을 아내와 함께 겪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요 며칠간 계속 의도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남은 일정도 어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있었지만, 아내와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걱정이 조금 누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아내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낯선 땅의 깜깜한 밤에 불편한 차숙이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했다.


종일 멍하니 구름만 바라봐도 심심하지 않았던 에스와티니


 산 사이로 떠오르는 햇살에 일어나 JJ와 헤어져서 에스와티니(스와질란드)의 수도 음바바네에서 아침을 먹고 에줄위니 계곡의 캠핑장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기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는지 에스와티니는 쾌적한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으로 눈을 사로잡았고, 인구의 3분의 1이 에이즈 감염자라는 안타까운 사실과는 별개로 순박하고 친절한 사람들로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깨끗한 자연경관과 야생 동물들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명소도 짜릿한 액티비티도 특별한 먹거리도 없는 곳이었지만 계획도 없이 에스와티니에 머무는 내내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아내와 함께 차에서 지새웠던 그 밤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불편한 차 속에서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며, 이미 벌어진 일들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확실하지 않은 일들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현재의 상황 안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을 은연중에 깨달았나 보다. 아프리카 속담에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고, 함께 가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함께 이기에 서로에게 의지하며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남아공과 레소토 국경의 드라켄즈버그 지역. 그림같은 로얄나탈 국립공원 캠핑장


 에스와티니를 떠나 남아공으로 재입국하면서 다시 한번 입국 심사대에 섰다. 남은 여행 일정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긴장은 했지만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우리 함께 라면, 다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또 새로운 방법을 찾아 여행을 이어나갈 것이기에 그냥 주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침착한 태도 덕분이었을까? 우리의 일정을 설명하고 출국 항공권을 보여주자 입국 심사원은 체류기간을 넉넉하게 계산해서 입국 도장을 찍어주었다. 며칠 전에 그렇게 짜증 나고 속상했던 일들이 종래에는 이렇게 쉽게 해결되었다. 


 문제가 해결되자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다. 그림같이 웅장한 드라켄즈버그 산맥을 지나 아름다운 가든 루트의 해안을 흠뻑 즐기고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가 렌터카를 반납했다. 차 앞유리의 깨진 흔적은 나의 걱정과는 달리 저렴한 비용으로 수리해서 반납할 수 있었고, 걱정했던 카드 결제 사기는 발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하마터면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한 필요 없는 걱정으로 눈 앞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놓칠 뻔했었다. 우리 부부는 여행을 통해서 또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었다. 우리 함께라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이전 12화 우리의 모험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