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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Jun 19. 2018

그곳을 가기 전과 그 후

볼리비아, 우유니


"나 이제 그만할래.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내의 이 말을 며칠 전부터 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여행을 시작한 지 열 달이 조금 지났을 무렵 우리는 볼리비아에 머물고 있었다. 국경을 넘어서 볼리비아에 들어설 때만 해도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우유니 소금사막이 가까워져 간다는 생각에 설레었지만, 탔다 하면 10시간은 훌쩍 넘는 장거리 버스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무거운 배낭,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치안 상황에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지날수록 낯선 문화와 풍경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져 가면서 점점 흥미가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빠져 있을 때에는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여행자의 삶을 그토록 간절히 바랬건만, 하루하루가 새로움으로 가득한 여행자의 일상이 주어졌지만 여기서도 어김없이 권태로움은 싹을 틔웠다. '인간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존재'라고 했던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런 의미였구나를 절실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함께 하는 여행이 항상 알콩달콩할 거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여정이 길어지면서 여행 동반자의 관계 사이에도 어느새 권태가 찾아왔다. 여행 중에 티격태격하는 원인의 대부분은 의견 대립보다는 문제 상황을 대하는 태도와 처리 방식의 차이 때문에 발생했다. 여행 중에 끊임없이 마주치는 선택의 순간과 그로 인해 발생된 결과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시시비비를 따지기도 하고 동시에 각자를 자책하기도 했다. 그런 일상이 수개월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목구멍까지 불만이 올라왔다가도 또다시 반복해서 뭐하겠나는 생각에 다시 꾹꾹 눌러 내리기 시작했다. 충돌이 없으니 무덤덤해졌고 그러다 보니 무신경해졌다. 서로의 대화 사이에 지루함이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우리는 우유니 소금사막(정확히는 소금 평원)을 만났다. 우리에게 우유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을 꿈꾸게 만드는 그 신비로운 풍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유니로 향하는 과정과 우유니에서 머무는 동안에 느낀 감정들이 여행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는 큰 전환점이 되었다.


10시간 정도의 이동은 장거리 축에도 못 끼는 남미의 버스 여행


  우유니 소금사막은 볼리비아와 칠레와의 국경 부근 안데스 고원지대인 알티플라노에 위치하고 있다. 우유니로 향하는 여정은 볼리비아의 사법 수도인 수크레에 시작되었다. 수크레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스페인 식민시대의 건물과 도시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여행을 마친 지금에서야 그때의 사진을 뒤적이거나 TV 영상 속의 수크레를 다시 볼 때마다 저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나 새삼 감탄을 하지만 정작 그곳에 머물고 있던 순간에는 그 무엇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지 못했었다. 명소를 찾아가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일에 흥미를 잃고, 마치 관광지에 오랫동안 머물러 더 이상 낯설게 없는 외지인처럼 무심한 눈길로 거리를 걷고 시장에서 찬거리를 서 하루 세끼 밥해먹는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그 시점에 우리 부부는 매사에 시큰둥했었던 것 같다. 권태로움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찬란한 순간을 그저 그런 평범한 하루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하얀색 건물과 깨끗한 거리가 인상적이었던 수크레


 그렇게 바라 왔던 순간이 권태로움에 사로 잡히는 이유 중에는 너무 순조로웠던 여정도 한몫을 했던 것 같다. 어딜 가나 낯선 곳이라 항상 약간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여행이 길어지면서 그 긴장감이 습관이 되었고, 덕분에 사고 없이 계획대로 예상대로 일들이 진행되었지만 특별한 사건이 없는 여행은 점점 무미건조해져 갔다. 그러던 중에 우유니로 향하는 길에서 예상을 벗어난 일들이 일어나면서 무사안일이 안겨준 권태로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남미를 여행하다 보면 버스 회사나 항공사의 파업으로 인해 발이 묶이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아예 도시로 진출입하는 도로를 막아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마땅한 대안도 없이 파업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한다. 수크레에 머무는 중에도 볼리비아 버스 회사들의 파업으로 인해 우유니로 떠나는 버스 운행이 재개되기를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파업이 끝나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우유니로 떠나기 위해 터미널로 갔지만 우유니행 야간 버스는 이미 매진이었다. 해는 지고 있고, 버스표는 없고, 숙소는 나온 상태...  여행 중에 오랜만에 만난 난감한 상황에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일단 다시 시내로 돌아가서 아무 숙소라도 잡을까? 아님 아무 버스라도 올라타고 우유니 근처 도시로 가서 갈아탈까? 하루를 허비하더라도 안전한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님 혹시 모를 가능성에 모험을 할 것인가? 여기서 아내와 나는 서로 의견이 갈렸지만 오래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태라서 일단 우유니까지 가는 길에 있는 도시인 포토시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사실 그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한 포토시 버스 터미널은 문을 닫은지는 이미 수시간이 지난 후였으며, 터미널 근처에는 낡디 낡은 숙소마저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위험천만한 남미의 밤거리를 헤매게 된 난감한 상황을 먼저 수습해야 했다. 웃돈을 주고라도 비공식적으로 운행하는 사설 장거리 승합차를 타려고 했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위험한 행동이었는데 당시에는 어떻게든 우범지대인 터미널 주변을 벗어나고 싶었었다. 결국 내가 교통편을 찾아 방황하던 사이에 아내가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고 사정을 설명한 끝에 어느 건물의 로비에서 노숙을 할 수 있었고, 다음날 새벽에 꾀죄죄한 꼴로 우유니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이 버스 티켓 하나를 위해 참 많은 일이 겪어야 했다.


 그냥 위의 글로만 보면 버스 스케줄을 잘못 판단해서 생긴 해프닝 같지만, 사실은 다 말하기에는 너무 길어져서 줄였을 뿐이지 수크레를 떠나 다음날 낮에 우유니 마을에 도착하기까지의 12시간 동안은 이상하리만큼 예상치 못한 사건이 계속 이어져서 긴장과 안도의 감정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느슨해졌던 마음이 갑자기 바짝 조여 매어진 기분이 들었다. 순간순간 최선의 방법을 판단해야 했고 예상에서 벗어난 결과는 빨리 받아들이고 다음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 과정에서 아내와 계속해서 의견이 충돌하면서 서로를 설득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오랜만에 다양한 감정들이 오고 갔다. 아내의 판단 착오로 인해 밤거리에서 노숙을 하게 되면서 아내는 나에게 몹시 미안한 나머지 내가 조금이나마 편하게 눈을 붙일 수 있도록 배려했고, 나의 우유 부단함 때문에 아내에게 선택을 짐을 지운 나는 어떻게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도록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로 손꼽히는 포토시에서 가쁜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녀야 했다. 위기는 잠시 소원해졌던 우리 부부가 다시 한 팀으로 똘똘 뭉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우유니의 명소 소금호텔에는 각국 여행자들이 걸어놓은 국기를 만날 수 있다.


 우여곡절에 도착한 우유니 소금사막은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놀라운 곳이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비현실적인 풍경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우유니에 가기를 꿈꾸는지 한 번에 설명해 주었다. 우유니 소금사막으로 가는 전초기지 격인 우유니 마을에서 사륜구동차를 타고 1시간 정도를 달리자 눈앞에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빈 공간이 나타났다. 마침 내가 찾아갔던 시기가 우기의 끝자락이어서 우리나라 전라남도와 넓이가 비슷하다는 거대한 평원이 잔잔한 물로 가득 차 있었다. 360도 어딜 봐도 지평선을 기준으로 데칼코마니처럼 하늘을 비추고 있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차로 달려 그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내렸다. 맨발로 잔잔한 물 위로 하늘이 땅인지 땅이 하늘인지 모를 판타지 소설 속 같은 공간을 걷는 느낌은 마치 꿈속에 헤매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 우유니가 더 신비로웠던 이유는 눈앞에 압도적인 공간감이 펼쳐지는 가운데 귀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몽환적인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소리를 반사시켜줄 어떤 것도 없이 완벽하게 빈 공간이었기에 내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소음이 전혀 없는 무서우리만큼 고요한 공간이었다. 사후 세계가 있다면 혹시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물과 소리가 사라진 공간, 그 비현실적인 고요의 공간에서 나는 지금껏 익숙했던 세상의 경험을 잊고 새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느새 마음속에 머물던 일상의 권태로움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구에서 가장 큰 거울.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이었던 그 곳.


 우유니를 떠난 지 한참이 지나도록 꿈을 꾼 듯한 묘한 기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하얀 소금 평원을 벗어나자 이번에는 끝없는 황무지가 펼쳐졌다. 저 멀리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지평선의 가운데에 붓으로 그린 듯한 적란운이 높게 솟아있었고, 아스라이 보이는 그 한 뼘의 공간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살면서 한 번도 보지도 못했던 아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풍광이었다. 신비로웠다. 곧 또 다른 미지의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유니에서 칠레 북부의 아타카마 사막에 이르는 알티플라노 지역을 사륜구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그 2박 3일은 다른 행성에 다녀온 듯한 생경한 이미지도 각인되어 있다. 마치 영화 속에 봤던 화성의 표면처럼 거대한 화산석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평원에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고 지평선의 경계에는 하얀 연기를 흘리고 있는 화산이 톱니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한참을 달리다 나온 핑크빛 호수에는 거짓말처럼 플라밍고 한 무리가 외다리로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으며 이어서 만난 녹색의 호수에는 동그란 눈망울의 야마 무리가 물 위를 걷고 있었다. 기괴한 모양의 거대한 나무가 서 있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이윽고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서있는 바위라는 것들 깨달았으며, 부글부글 끓는 땅 사이로 유황 냄새가 나는 수증기가 하늘 높이 기둥을 이루는 숲을 만나기도 했다.


허허벌판에 나무가 아니 바위가 서있는 기묘한 풍경


 어떻게 설명해도 거짓말 같고 아무리 말로 그려보려 해도 쉽지 않은 곳, 눈으로 보면서도 현실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그곳에 머물면서 여행 중에 처음으로 1분 1초가 흐르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기억 속에 영원히 새기고 싶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흥미를 잃고 시큰둥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이렇게 멋진 순간을 함께하고 있는 아내가 있었다. 서로 마주 보았을 때에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그동안 마음 여기저기에 남아있던 서운했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부스러지며 떨어져 나갔다. 그저 이 순간을 함께 해서 행복했다.


저 플라밍고는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


 알티플라노를 지나 칠레 북부 아따까마 사막 가운데에 있는 산 페드로 데 아타까마에 도착했다. 한 달을 넘게 4000 미터 대의 고원지대에 있다가 갑자기 2000 미터 대로 내려오니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공기가 찰지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대신에 갑자기 만난 뜨겁고 건조한 사막의 기후에 적응해야만 했다. 또한 볼리비아에서 칠레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두 세배로 뛰어버린 체감 물가에도 적응해야 했다. 한시라도 물가가 비싸고 덥고 먼지 날리는 도시를 떠나고 싶었지만 또다시 교통편이 꼬여버렸다. 3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마을에서 며칠간 머물러야 했다. 비록 일정에 차질이 생겼지만 앞으로 이어질 여행에 대해 여러 가지 방향으로 계획을 세우고 조사를 하면서 다시 신이 나기 시작했다. 서로 말하지 못할 불만이 쌓여서 곧 터져버릴 듯한 시한폭탄의 카운트다운도 다시 리셋되었다. 아마 수크레를 떠나 우유니를 거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도시에서 남은 여행을 포기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너의 손바닥 위에 있구나.


 욕망과 권태를 시계추처럼 오고 가는 존재. 일상을 살다 보면 욕망의 순간에 사로잡혀 있는 순간도 있고 권태로움에 빠져 무기력해지는 순간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순간에 매몰되지 않고 시계추처럼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 생각된다. 무엇인가에 빠져 흥분된 상태에 있다가도 잠시 여유를 가져야 열정을 계속 이어갈 수 일을 테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보내던 중에는 뭔가 자극될 만한 사건을 통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일도 필요하다. 관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익숙해지고 한없이 편한 사이만을 지속해가다는 서로의 매력을 잊어갈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낯선 상황 속에서 던져져 위기를 같이 극복하기도 하고 평소와 다른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는 기회를 가진다면 관계를 더욱 다질 수 있으리라. 우유니를 가기 전과 그 후를 경험하면서 권태로움을 극복하고 활력을 찾아주는 여행의 힘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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