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2016.10.13 12:29
4일간의 어마 무시했던 국내 비행을 마치고 다시 휴스턴.
내 인스타그램을 보시고 지원동기 및 과정 등에 대해 여쭤보신 승무원 지망생분들이 여럿 계셔서 오늘은 내가 왜 승무원이 되었는지 얘기해보려고 한다.
나는 미국 3대 메이저 항공사 중 한 곳의 승무원이다.
우리 항공사는 소셜미디어 정책에 있어서 굉장히 제한적이고 철저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항공사명을 언급하진 못하지만 유니폼을 보면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 작은데 승무원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은 승무원이 공항 안에서 자기 키만 한 가방을 끌며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면 나일지도 모른다.
작은 키란 나에겐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 "가끔 높은 곳에 닿기 힘들어 의자에 올라가야 하는 것" 정도의 의미를 가지지만 우리 엄마에겐 "평생의 한"일만큼 큰 의미가 있다.
엄마는 어렸을 때 말을 또박또박 잘하던 나를 아나운서 시키고 싶어 했다. 남들보다 조금은 유별난 사춘기와 과도기를 겪으며 엄마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나 또한 10대, 그리고 20대를 지나며 꿈이 여러 번 바뀌었고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갖고 미대를 준비하던 시기를 제외하면 딱히 장래희망이 있다거나 혹은 그걸 위해 노력한다거나 한 적은 없었다.
2005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공부를 지지리도 안 하고 왁자지껄 말괄량이로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 후에 대학생 때도 뛰어나게 뭔가를 잘하진 않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커피숍을 차리고 싶어 한국에 갔고 결국 미국계 public relations 에이전시라는 (전공과는 무관한) 곳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인턴 계약이 끝날 즈음해서 회사에 정직원 자리가 나길 바랐지만 내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난 가족이 있는 미국 피닉스에 돌아가 정직원 자리가 나길 기다리기로 했다 (10년 만에 간 한국에서의 9개월은 내 젊음을 최고 빛나게 해 준 값진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 달여간을 아무 일도 없이 집에만 있자니 맘 편히 쉬라는 엄마 아빠의 말에도 난 괜한 자격지심에 눈치가 보였다. 그래서 직종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지원해보는 중에 친구가 넌지시 "야, 한국말할 줄 아는데 미국 항공사 지원해보는 거 어때?"라고 던진 말에 무심코 지원해본 게 덜컥! 면접이 잡혀버렸다.
생각해보면.. 어떻게 보면.. 어떤 분들은 승무원이 되기 위해 몇 년을 준비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비록 항공사마다 기준이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운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누구나 어린 시절 한 번쯤은 유니폼을 빼입은 승무원들을 보며 꿈과 환상을 가져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키"라는 장애물 아닌 장애물 때문에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미국 항공사는 대부분의 아시아권 항공사들과는 달리 "키"에 있어서 좀 유연하고 관대한 편이기에 지금 내가 승무원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원서를 낸 날부터 트레이닝에 가기까지 단 한 달여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고 모든 것이 마치 미리 계획되어 있던 일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니 말이다.
인생에서 기회는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오곤 한다. 그래도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너무 뻔하다. 다만 인생은 계속해서 살아내는, 끊임없이 걷는 발자국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길이다. 내가 밟아 온 지난 발자국들 중 버릴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참 열심히 걸었다. 열심히 걷다 보니 기회가 왔을 때 기회가 기회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리될 줄 모르고 했던 일들이 결국엔 날 연단시키고 준비시켰던 거라고 생각하면 단 한 걸음도 결코 허투루 디뎠다고 할 수 없다.
쓰고나니 뭔가 소설같은 웅장하고 대단한 계기가 있던 게 아니어서 민망하긴 하다만 미국 항공사 지원을 생각하고 있는데 뭔가 걸리는 점 때문에 긴가민가한 분들이 계시다면 어서 지원부터 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지금 한창 다국어 구사자들을 채용 중에 있으니 신분에 문제가 없다면 어서! 망설이지 마시고 도전해보길.
내가 했으면 너도 할 수 있어요
P.S. 2016년 처음 승무원이 된 후 쓴 글입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직격타를 맞은 미국 항공사 승무원입니다.
2016년에 쓰기 시작하여 여태까지 한달에 2-3번씩 저의 다른 개인적인 공간에 써왔던 글들을 옮겨 승무원으로의 삶에 대한 얘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