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 체크 리스트가 우리집 설명서라고?
그날은 일주일간의 베트남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로 다음날이었다. 내 입국 일정에 맞추어 공인중개사 소장님과 약속을 잡아두었다. 그런데 하필, 예상치 못했던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먹은 마지막 현지식이 잘못되었는지 배탈이 나버린 것이다. 새벽까지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나 자신과 힘겹게 사투를 벌였다. 메이크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에 의지하며 꾸역꾸역 약속한 집을 보러 갔다. 그냥 왠지 모르게 그날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제주도로 떠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단 하루도 지체할 수 없었다.
"여기 그냥 하세요. 신혼부부 살기 좋아."
해당 집을 보러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소장님은 말했다. 네? 거 참 보지도 않고 집을 어떻게 삽니까.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저번주에 이 집 보러 온다는 사람 있었는데 그땐 세입자가 여행 가서 못 봤어요. 그 사람은 매물로 나온 더 아래층 집 보자마자 바로 계약했어요. 여긴 있으면 바로 팔려."
흠 거짓말하시는 거 아닙니까. 역시 속으로만. 하지만 후에 국토부 실거래 페이지의 계약 내역 중 층과 날짜를 맞춰 보니 사실이었다.
둘러본 집은 나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깨끗한 컨디션에 햇빛이 잘 드는 뻥 뚫린 도로뷰 그리고 지하철역 도보 대략 5분. 세입자분들이 계시기도 했고 딱히 더 자세히 볼만한 부분이 없어서 집 구경은 5분 안에 끝났다. 이후에도 몇 개의 집을 차례대로 가보며 밝았던 하루가 저물어 갔다.
하지만 여러 가지 걸리는 부분들이 있었다. 크게는 1군 브랜드 아파트가 아니라는 점, 세대수가 적다는 점. 그렇지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마치 운명의 붉은 실이라도 이미 묶여버린 듯, 스쳐갔던 많은 집들과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L과 머리를 맞대고 계속 고민했다. 현재 우리가 매매할 수 있는 선에서 포기해도 무방한 건 뭐지? 불현듯 떠올랐다. 1달 전쯤에 스타벅스에 앉아 막무가내로 적어놓았던 우리의 희망사항 체크리스트가.
~ 막무가내 체크&위시 리스트 ~
1. 지하철 도보 10분 내외
2. 방 3개, 화장실 2개
3. 주변 공원
4. 가까운 대형마트
5. 지하주차장 엘베 연결
6. 치안 안전
7. 버스 정류장 거리
8. 버스 배차 간격
누군가에겐 당연한 조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햇병아리 우리들에게는 '이건 좀.. 예산 대비 양심 불량아님?'은 무일푼 거지 행색이어도 언제나 맛있는 것만을 갈망하는 양심 불량!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 집, 다시 보니 체크리스트에 적어놓은 항목을 정말 놀랍게도 ALL PASS! 아주 모조리 깔끔하게 충족했다. 처음 보는 이름의 브랜드와 적은 세대수는 [좋은 입지]라는 강력한 방어권으로 말끔하게 상쇄했다.
값비싼 브랜드 아파트들에 둘러싸인 역세권 준신축 소형 아파트란 무엇인가. 비슷한 가격대의 30년된 구축 브랜드 아파트에 비해선 소형 평수이지만 역에 더 가깝고 깔끔한 준신축이고, 신축 브랜드 아파트에 비해선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같은 입지에 나란히 붙어있다. 나와 L같은 신혼부부에겐 놓칠 수 없는 매물 그 이상의 보물인 것이다.
"아파트를 살 때는 내가 아니라 다음 사람을 위해 사는 거예요. 다음 사람이 사고 싶은 집인지 그걸 봐야 돼요."
꽤 많은 공인중개사 소장님들과 나눈 다양한 이야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다. 과연 이 집을 다음 사람도 좋아할까? 좋은 입지의 핵심 요소는 좋은 학군이다. 그런데 나는 이미 대학교까지 다 졸업해서 학군이랑 아무 상관없는데? 처음의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학군은 내가 아닌 다음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곳은 좋은 학군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더더욱 충분한 수요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입지는 깡패다. 깡패가 입지다!
그날 밤까지 그 아파트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고민했다. 정말 이 집을 사도 되는 걸까? 아까 낮에 5분도 제대로 못 본 것 같은데 진짜 괜찮을까? 호갱노노에 입주민 평은 좋긴 하던데, 다들 그냥 좋은 소리만 하는 거 아닐까? 주차장과 분리수거장을 둘러보던 우리에게 경비 아저씨가 다가왔다. 입주민들이 싫어하니 낮에 부동산 사람이랑 같이 오라고 쫓아내셨다. 앗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곧 그 입주민이 되어 다시 오겠습니다.
I'll be back soon.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나와 L. 하루 동안 더 고민했다. 또다시 모여 최종적으로 우리의 자금 계획을 정리한 후 결정했다. 바로 소장님께 연락했다.
먼저 가계약금을 넣어야 하니 매도인(현재의 집주인)의 계좌번호를 받아 다시 연락 주겠다고 했다. 떨리지만 배는 고프니 저녁으로 근처 오리 불고기 식당을 갔다.
지잉-
고기를 다 먹고 볶음밥을 볶아야 할 시점이 왔을 때, 기다리던 계좌번호가 왔다. 두근거리는 맘을 가라앉히고 숟가락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곧 이어 1회용 앞치마를 목에 건 그 채로 바로 가계약금을 입금했다. 이거 지금 진짜지? 우리가 지금 집을 산다고? 곧이어 계약 사항에 대한 소장님의 안내 문자가 왔다. 더 이상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당연히 먹어야 할 볶음밥을 패스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거 진짜다. 내가! 우리가 집을 산다!
우리의 신혼집이자 첫 아파트의 매매 계약날이 이루어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재밌는 건 그날은 연차 소진을 포함한 서류상 공식적인 나의 퇴사일 바로 전날이라는 점이다. 퇴사를 결심한 두 달 전의 내가 이 단계까지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몰랐다. 절대 알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초심자의 행운이라면 그것도 좋다. 앞으로도 이 행운을 기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쌓았으니까!
본 계약서 작성 일자는 5일 뒤. 그런데 우리가 계약한 집의 더 아래층 매물이 조금 더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 계약금의 2배를 주고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후에 집값을 더 올리거나 아예 안 팔거나. 모두 집주인의 자유다. 소장님도 함께 걱정했다.
얼마 전에 어떤 신혼 부부의 계약이 당일에 파기되어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소장님 탓이 아니지만 그 앞에서 괜히 미안한 마음으로 달래줄 수 밖에 없었다는 무서운 이야기. 에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5일간 패닉 속에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계약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