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이야기
오전 9시 30분 - 11시
밖을 나서니 인도의 빠하르간지보다는 약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레 얼굴을 찡그리게 만드는 냄새가 코를 스친다. 비슷한 냄새를 찾자면, 아주 오래된 공중화장실의 남자소변기의 오줌 썩는 냄새일 것이다. 마닐라의 지하철인 LRT를 타기 위해 가는 길에는 이른 아침이지만, 아직 누워있는 사람들이 꽤 있다. 거리의 노숙자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밤에 추워서 얼어죽겠지만, 이곳은 1년 내내 밖에서 잘만하다. 나도 3개월내로 무엇인가 뾰족한 수가 없으면 저들 옆의 한 구석이 내 자리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웃음이 났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을까?
여기서 잠깐 멀쩡하게 대학 나오고 직장 잘 다니던 내가 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을지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나의 지난 3개월의 이야기를 잠깐 해 보겠다. 사실, 그 시작은 간단했다.
코로나19 직전 은퇴하고 세계여행을 꿈꾸던 한 30대가 있었다. 평소 해외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고, 나름 해외여행도 많이 했었지만 3년정도 제대로 세계를 탐험할 준비를 10년간 차곡차곡 해 왔더랬다. 하지만, 갑자기 팬데믹이 터졌고, 처음에는 몇 달 기다리면 될 줄 알았지만 도통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는 눈물을 머금고 계획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뿐이랴? 처음에 취소가 아닌 연장만 여러번 하다가 꽤 고가의 유럽행 왕복티켓도 날려먹었다. 아마 들뜬 기분으로 첫 소풍을 기대하던 어린아이가 갑자기 내린 장마로 소풍이 취소된 것 마냥 30대의 그 남자는 울고 싶어졌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거의 1년을 그냥 허송세월하며 보냈다고 한다. 멋지게 사표내고 나온 회사를 다시 들어가기도 싫고, 지난 10년간 열심히 살아온 자신한테 상을 주고 싶어 그냥 놀고 싶었을 수도 있다. 어쨌건 그렇게 1년을 놀고, 다시 일을 하려 했지만 이미 3년정도 쉬려고 마음 먹은터라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그 1년동안 남자는 원했던 대로 신나게 놀지도 못했다. 집에서 온라인 게임을 하고, 가끔 캠핑을 가는 정도? 3년 세계여행으로 모아둔 돈도 충분하겠다.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주식과 비트코인에 자꾸 관심이 갔다. 사실 20대 초반에 주식에 손을 댔다가 어렵게 아르바이트했던 돈 천만원의 손실을 봤던 나는 그동안 죽을 때까지 주식은 안하고 저축만 하겠노라고 다짐했고, 그 맹세를 지켜오고 있었다.
항상 처음이 어렵다. 초반에 세계여행 자금의 일부를 투자해서 무료 300%의 수익을 얻었던 나는 마치 전업트레이더라도 된 마냥 투자금을 늘렸고 급기야 가능한 대출까지 모두 내며 위험한 투자를 시작했다.
결과는...
그냥 예상대로였고 나는 차마 돈을 빌린 지인들을 볼 수 없어 무작정 필리핀으로 도망쳐왔다. 수중에 가진 돈은 미국 달러 1000불. 처음에는 카지노에서 이 돈으로 한 탕 크게 하려 했지만, 얼마나 무모한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일단 1000불이 떨어질 때까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기로 했다. 필리핀 페소로하면 오만칠천페소... 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내가 찾아가는 곳은 어제 어렵게 연락되어 찾은 일자리이다.
해외취업을 한국에서 미리 찾아보고 온 것이 아니라 필리핀 커뮤니티인 필고에서 내 나이대의 구인광고를 보고 연락하니, 대뜸 주소를 알려주며 내일 오전 아무 때나 오라고만 했다.
얼마전 본 드라마에서 그런 식으로 갔다가 갇혀서 보이스 피싱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상하게 그 상황이 두렵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그 관짝 같은 곳보다는 어쩌면 그 곳 숙소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미친 생각까지 하게 된다.
마닐라의 LRT는 의외로 고가의 운송수단이다. 지프니보다 기본운임이 비싸고, 나름 보안 검색도 하기 때문에 LRT를 타는 필리핀 사람은 적어도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외국인인 점을 이용해 사람들이 안 붐비는 여성전용칸에 선다. 가끔 가드가 내쫓기도 하지만, 그냥 영어 못 알아듣는 척 하면 별 말 하지 않는다.
20대 초반에 이곳에 왔을 땐 LRT에서 필리핀 바바애(여자)들이 나를 힐끔힐끔 보기도 했는데, 뭐 이제는 아무도 관심도 없다. 어느덧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 요샌 관리도 하지 않아 누가 보면 딱 40대중반의 중국아저씨로 보일 것 같다. 그나마 머리가 안 벗어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한참을 달려서 어제 전화받은 사람이 알려준 건물에 도착했다. 걱정과는 다르게 꽤 깔끔한 사무실이다. 여기는 도대체 어떤 회사일까?
무심코 스마트폰을 본다. 내 스마트폰에는 카톡이 없다. 매일 단톡방에서 쏟아지는 메시지들이 지겨웠는데,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여기서 알게된 필리핀 친구들이 보낸 페이스톡 메시지 2개가 전부이다. 시간은 오전 10시 59분이었는데 곧 11시로 바뀌었다.
이렇게 정각이 바뀌는 것을 본 것도 오랜만이라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오전 11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