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로 인한 나
나 자신을 부정하고 거부했던 시간들을 눌러 적는다. 그리고 ‘너'와의 만남에 대한 서사.
그때 나는 병들어 있었다. 젊은 날을 집어삼킨 오랜 소화기 질환으로 몸과 마음이 다 앙상해졌다. 병원에 들락날락하며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수 없이 내시경을 찍고 약을 먹었다. 그러나 멈춰 선 위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속쓰림과 극심한 더부룩함을 달고 살았다. 뼈만 남은 신체는 저주스러웠다. 일상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1 멈춰 서다
말했다.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아프다고. 만성화된 소화불량이 몸의 컨디션은 물론 정신까지 갉아먹고 있다고. 몸은 바싹 말랐고 동시에 자존감도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왜 이리 말랐냐", "못 먹고 다니니" 안쓰러움의 상징이 되어버린 나, 그럼에도 태연한 척하다가 범람하는 강둑처럼 무너져버린 나에 대해.
서른 조금 넘은 젊은이가 저무는 낙화에 가슴이 시렸다. 자그마한 일도 버겁게 느껴지는 경우가 잦았다. 변화를 꾀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일터에 만족하고 있었다. 만난 인연들이 소중했다. 회복한 후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병가 휴직계를 내겠습니다.”
#2 떠나다
“아프다고 휴가까지 내더니 여행을 갔어?” 눈치가 보였지만 대뜸 선택을 했다. 나중에 설명하자. 어차피 병원은 소용이 없었다. 현대의학은 맹점이 많으며 약은 독에 가깝다는 자연치유 책을 열심히 보기도 했다. 근래 가장 평안했던 순간, 걷기와 여행은 내게 유희가 아니다. 심신의 기갈을 채우는 치유다.
나이자 내가 아닌 나. 비쩍 마르고 초라한 나는 내가 아니었다. 초라한 나는 나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분열됐다. 그 간극만큼 결핍이 쌓였다. 결핍은 메마르고 불안한 심리를, 기피를, 거짓 식욕을, 일신의 흐트러짐을 낳았다. 아픔의 악순환이었다.
나의 일, 나의 인연들, 나의 삶터로부터 벗어나 홀로 길 위에 섰다. 시간을 멈추고 익숙함을 등지고 세상과 단절된 채, 나에게로 돌아가는 여정을 떠난다. 내가 내가 되길 바라며. 그리고 돌아올 것이다.
#3 자화상
가슴이 아렸다. 훌쩍 떠난 여정,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서 반 고흐의 '자화상'을 봤을 때. 그의 우울에서 나의 얼굴이 보였다. 고흐가 생을 마감하며 했다는 말. "슬픔은 영원히 계속된다” 아픔이 계속되더라도 부둥켜안고 살아낼 수 있을지,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지, 그 사이 간극이 크지 않음을 요동 치는 심리적 여정을 겪으며 깨달았다. 그때마다 속으로 외친 한마디. "철저하게 절망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이냐!” 여행지에 가져간 책에서 읽은 문장이었다. "이 무슨 행운이냐! 아름다운 시가 하나 생길 판이다”('말', 사르트르). 자화상을 가슴에 담게 된 것, 얼마나 기쁜 일이냐.
다시 일터로 복귀하며 거울을 본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별로 변한 게 없다. 무엇을 한 것일까? 나는 분명 나이지만, 두 달 전의 나와는 다르다. 보이지 않는 변화를 성숙으로 이끄는 건, 나의 숙제다.
#4 여전히, 그래도
일을 마치고 집까지 힘없이 걸었다. 공터 어딘가에 주저앉아버렸다. 쉼이 남긴 흔적이 허망했다. 낫지 않고 반복됨이 원망스러웠다. 나의 몸과 사이가 좋았더라면, 나는 만개한 장미 한 송이가 되었을까? 힘 없이 주저앉아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이 시간에, 더 가치로운 무언가를 하였더라면 나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아침에 힘겹게 눈을 뜨고 자정을 훌쩍 넘어 어렵게 눈을 붙인다. 심신과의 불화를 끌어안고 잘 살아보리라, 수도 없이 다짐했건만, 여전히 미숙하다. 그래도.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
#5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주말, 무거운 육신을 일으켜 침을 맞으러 다니는 여의도 한의원으로 향했다. 여의나루역에서 내렸고 푸른 잔디와 햇살이 좋았다. 빛을 불어넣고 싶어서 한강공원에 들어갔다. 한산한 잔디밭에 누웠다. 이어폰을 꼽고 루시드폴의 노래를 오랜만에 들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난 단지 약했을 뿐. "난 단지 약했을 뿐 널 멀리하려 했던 건 아니었는데, 난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너무 멀리 가진 마 어쩔 수 없다 해도”(‘새’, 루시드폴)
눈을 떴고, 익숙한 모양의 야구잠바를 입은 무리들이 보였다. 내가 다녔던 학교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남녀가 뒤섞여 싱그러운 웃음을 짓는 봄날의 젊음들. 8년 전 딱 이맘때다. 귀여운 동기들과 어우러진 늦깎이 신입생, 잔디에 둘러앉아 꼭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지. 옛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의 젊음이 한스럽다. 기형도의 시 한수가 떠올랐다.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눈물이 핑 돌았다.
#6 악의 꽃
정상과 비정상, 불행과 행복, 희극과 비극, 고통과 안락, 건강과 병듦, 그 경계에 대한 가치 기준이 폭발적으로 모호해진다. 나의 머리와 인식은 완전히 전복된다. 꽤 오랫동안 고통을 거부했다. 아무리 떠밀어도 나가지 않자, 어둠 속에서의 낭만, 아픔으로 인해 얻은 것, 전화위복을 되뇌었다. 이제는 그런 자기위안마저도 내던지고 있다.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악의 꽃’(보들레르)을 바라본다. “나 자신의 미의 정의를 찾아냈다. 그것은 강렬하고도 슬픈 그 무엇인 것이다. 불행이 없는 곳에서는 미의 전형을 거의 인식할 수가 없을 것이다”
행복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나는 컴컴한 짙은 안갯속을 비틀 대며 홀연히 걸어 들어간다.
#7 웃음이, 뜨거운 눈물이, 손길이 그립지 않은 건 아니다. 그립지 않은 건 아니다.
#8 ……
견뎌야 할지 놓아야 할지, 새날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지, 더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이 고통을 감내하고 관리하며 살아야 할지, 비루함과 절망을 부여잡고 생의 감각으로, 낭만으로 되뇌는 간청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암흑을 헤매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는 아침은 언제까지일지, 나의 삶은 어디까지일지.
계기는 당신이었다. 잃어버린 나를 찾고 구한 건 너로부터 시작되었다.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빙글뱅글 돌아 결국 제자리로, 더 바닥으로 추락한 시간들. 변화는 봄날의 햇빛처럼 내리쬔 너의 침투로부터 비롯되었다. 고립되어버린 나의 매캐한 세계를 향한 당신의 월경으로부터.
#1 이름을 불러주기 전
수더분한 인상의 아래층 동료 이상으로 무언가를 느껴본 적은 없었다. 아, 한차례 있었다. 같이 네트워킹 행사를 담당했을 때. 꼭 필요한 준비 하나가 지연되고 어긋났다. 나는 불안해하며 뭐라도 해보려고 땀을 냈다. 그런데 그녀는 태연하게 짐을 살피며 말을 건넸다. “그냥 편하게 있자. 서두른다고 변하는 것도 없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판에 저렇게 천하태평이라니. 얄미운 생각이 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삶을 같이할 짝을 만난다면 저런 사람이어야 할까.’ 주위 시선을 의식하며 불필요한 에너지를 과하게 쏟곤 하는 나. 제대로 과녁을 설정하면 한껏 역량을 쏟는 폭발력을 발휘하다가도, 좌표를 잃으면 구멍으로 숨어버리곤 하는 성향의 나였다. 그녀는 상당히 달라 보였다. 누가 뭐라 하든 적당히 흘려보내고, 스스로의 속도로 폴짝 걸어가버리는 초연함이 있어 보였다.
#2 만남
순간의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공’적으로만 엮여서 지내던 어느 날, 미묘하게 ‘사’적으로 보이는 그녀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퇴근 후 그녀와 성북동 북정마을 한양도성 성곽길을 걸었다.
서울의 부산함에서 떨어진 곳. 아무도 없는 고요한 평상에 단둘이 앉았다. 나는 파리로 떠난 치유의 여행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20대를 말했다. 프랑스. 나도 갔었지. 처음 듣는 그녀의 이야기. 지구 건너편까지 날아가 들어갔던 남프랑스의 오래된 수녀원, 스스로를 내려놓는 종신서원의 삶을 그렸던 때,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된 사연, 이후 계속 강한 신앙의 잣대를 가지고 살아온 삶. 나와는 정반대였다. 종교보다는 무신론을, ‘믿음과 따름’보다는 개인의 ‘실존적 기투’에 매료된 채 젊은 날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에겐 자유로움이 보였다. 성곽길을 따라 자연스레 불어오는 밤바람처럼 얽매임 없는 초탈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파리에서 사르트르를 읽으며 돌아다녔다. 그가 말하는 신 없는 자유와 그녀의 묵주반지를 낀 채 발산되는 듯한 자유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우리는 완벽하게 맞거나 같지 않아 보였지만 연인이 되었다. 지금 다가와서 내미는 손길, 궁금함을 더 알아가 보고 싶은 ‘감’을 가지고 시작해보자.
언젠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나를 한 가지 내려놓았다. 나를 하나 벗기어냈다. 그리고 만났다”
이 사연은 나의 브런치글 '밀레니얼 청년을 보내며' 연재 중 '억지로 맞선다고 용쓰기보다는' 편에서도 씀
#3 눈물과 기적
그녀보다도 파리해 보이는 손목과 팔은 여전히 혐오스러웠다. 그날도 속은 꽉 막혀 머리까지 어지럽혔다. 흡수하지 못하는 신체는 한겨울 벌거벗은 초라한 나뭇가지 같았다. 나는 또 우수에 찬 표정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살이 찌지 않아도 좋아. 야윈 모습이어도 괜찮아” 나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뜨겁게 울었다.
영화 ‘루르드’를 함께 봤다. 전신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가며 무기력과 결핍에 허우적대는 여주인공 크리스틴, 다시 일어나 걷게 되는 ‘기적’의 희망을 품은 성지순례.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크리스틴은 끝내 다시 휠체어에 살며시 주저앉는다. 거부하고 부정해왔던 자신의 육신에 대한 인정과 화해의 순간이었다. 몸을 내려놓는 그녀는 차분했다. 기적은 유별난 전례로서, 맹목적인 믿음으로서 찾아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 속 순수한 네 모습이 행복이야”(영화 OST), 현실을 오롯이 직시하고 받아안음에서부터, 매 순간의 소중함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기적으로 이끄는 오솔길일 것이다. 엔딩을 장식한 노랫말처럼.
“공기 중의 따뜻한 광선이 행복을 느끼는 미소처럼 떠다니는 걸 너는 느낄 수 있겠지” (‘Felicita', OST)
#4 치유
치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비로소 분열되었던 나는 다시 나라는 존재가 되어갔다. 변화는 거창한 생각이나 다짐이라기보다 구체적인 한 사람의 눈길과 손길로부터 다가왔다. 나는 아주 서서히 잘 먹었고, 나의 육신은 몇 년에 걸쳐 점차 살이 올랐다. 그리고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그녀는 나보다 연상이었다. 삼십 대 초반이었던 나는 결혼 생각도 준비도 안되어 있었다. 그녀에겐 그다지 준비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지금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보금자리를 함께 마련하길 바랐다. 망설이다가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 하자. 이것저것 더 재는 것보다 좋은 선택이 되리란 ‘감’은 있었다. 5년 가까이 된 지금, 종종 다투지만 잘 지내고 있다.
#5 너로 인한 나
“하나둘씩 부서지다. 하나둘씩 흩어진다. 내게 있던 모든 것이, 그대를 만나” (‘환상곡’, 에피톤 프로젝트)
그녀는 나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어지간해선 남하고 다투지 않는 나도 그녀와는 사소한 일로 싸우곤 했다. 다행히 결정타는 없었다. 사실 다르기에 보완되는 면이 더 컸다. 나 같은 사람끼리 살면 얼마나 답답할까, ‘쿨한 척 괜찮은 척’ 세상이 얼마나 재미없을까. 그녀를 만나며 자주든 생각이다. 발맞춰 걷기 위해 때론 나를 부수어내야 했다. 고집스러운 자아를 내려놓는 순간을 경험해야 했다. 그건 나를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낡은 나를 지워내고 보다 나은 나로 채워간 시간. 아픔과 고립의 쳇바퀴를 멈춰 세우고 스스로를 재생시킨 날들.
나를 나답게 해준 건 당신이었다. 초라할 때조차 손을 내밀고 곁으로 온 사람. 나에게서 탈출하여 당신에게로, 세상을 향해 다시 꼿꼿이 나갈 수 있게 용기를 준 사람. 너와의 만남에서 깨달았다. 나란 존재는 그저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유의지는 타자와 더불어 상호작용하며 형성된다. 자유의 본질은 사회적이고 너와 나의 진실된 만남에서부터 비롯된다. 삶을 돌아봐도 그랬다. 홀로 해낸 게 얼마나 될까. 모든 일에는 결국 누군가의 도움, 응원, 뒷받침의 흔적이 오밀조밀 깃들어 있다. 때마침 걸려온 전화, 부름, 알게 모르게 작용한 충고와 선의들. 이 모든 것들이 그물코처럼 얽혀서 나는 존재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물론 당신과 함께.
추신
1) 그녀의 이야기는 어떠할까? 기회가 되면 사연을 들어 정리해보는 것으로!
2) 나답게 해준 ‘타자’는 당연히 배우자나 가족이 아닐 수 있다. 삶의 길목 곳곳에서 다가오는 동반자, 커뮤니티와의 조우와 만남이 있어야 실제적인 ‘내’가 될 수 있음을. 한 사람이라도 진실하게 받아 안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가 되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관계 속에서 나답게 될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