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하다가 버스 다 떠나기 전에
연재 7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로 상징되는 불안의 시대는 일면적이지 않았다. 염세적이고 어두웠던, 세상이 끝날 거라는 유언비어도 떠돌던 세기말을 지나 어쨌든 희망으로 다가온 새천년을 젊고 어린 혈기로 맞았다. 밀레니얼들이 세상을 바꾼다. 남다름을 개척하라. 세계를 누비는 글로벌 노마드, 세련된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확산, 화려한 명품과 ‘핫플 힙플’ 등으로 상징되는 소비주의의 전면화, ‘절망이 없는’ 이미지로 가득한 SNS 시대와 중첩되어 다가왔다.
정지우 작가가 쓴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에는 “우리 세대는 어느 순간부터 묘한 환각에 시달려왔다.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 혹은 ‘환각’ 이미지 속에서의 삶”이란 표현이 있다. 서평을 쓴 김사과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밀레니얼 세대는 독특한 정신병을 앓고 있다. 한때 사회는 이들에게 영원한 행복과 무한한 자유라는 불가능한 이미지를 약속했다. 결과는 여전히 그 이미지의 실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망상과, 반대로 황폐화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 사이의 끝나지 않는 분열증이다”
현실과 가상,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분열은 디지털 세상의 상수였다. 셀피(selfie) 이미지로 가득한 오늘의 삶은 ‘가상의 주체성’들로 범람한다. 인간이 주체로 등장했던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며 자화상 그림이 만발한 것처럼, 지금은 디지털을 탑재한 제2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나는 셀피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쓴 프랑스 철학자 엘자 고다르의 비유다. 그러나 가상은 주체라기보다 상실에 가깝기도 하다. “가상의 자아 앞에 주체성을 잃어버린 개인은 화면 너머로 타자와 만나면서 공허함”(위의 책)을 느낀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친밀과는 거리가 있다. 그나마도 고립보다는 '좋아요'가 나았다.
정서적인 불안이나 나다운 삶을 다룬 책들이 인기를 끄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류의 자기 계발 조언을 담은 글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거창한 사회구조 모순을 분석하거나 언제 시도될지 모르는 대안을 나열한 책보다는 당장의 위안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과 같은 에두르지 않고 즉각 개입하여 던지는 조언도 마찬가지다.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말라.
흔들림은 당연하고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결과는 통제할 수 없다, 현재에 존재하고 즐겨라 등등. 불확실성을 겪으며 그 어떤 손에 잡힐듯한 확실성의 고지로 넘어온 이야기, 아니면 아예 확실성을 포기하고 커다란 바다에 몸을 내던져보라고 말하는 소위 멘토, 경험자의 조언은, 모순적인 메시지를 던져대는 환각의 사회에서, 문장 속에서나마 명료한 단비에 젖어들 수 있는 위로를 주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일하고 있던 동네로 한 중량감 있는 정치인이 ‘청년과의 대화’를 하고 싶다며 왔다. 대표적인 86세대 인사였다. 솔직 담백한 이야기를 원한다며, 언론은 물론 비서 한 명 대동하지 않고 조용히 찾아왔다. 형식이나 격식을 차린 사진 찍기용 모임이었으면 나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영역에서 일과 활동을 하고 있는, 82년생부터 90년대 초반생들이 모인 자리였다.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가, 나는 이런 말을 던졌다.
“우리는 불안을 내재화한 세대입니다. 일이든 관계든 진득하게 '보장'된다는 생각이 적어요. 표류하는 삶이란 표현이 적당할까요. 가만히 있다가도 습관처럼 두려움이 올라올 때도 많고요.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당장 많은 이들이 앓고 있는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대책을 대폭 늘린다든지, 일자리를 옮기거나 전환 시 안정을 줄 수 있는 지원을 넓힌다든지 하는 것 등. 비빌 언덕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생산성이든 창의든 뭐든 발휘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사회 현실에 비해 아직 많이 비어있고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정책을 통해 개개인의 불안을 사회적으로 경감할 수 있는 대안을 잘 모색하면 좋겠습니다.”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하고 개성을 더 발휘할 수 있는 사회로 가기 위해 구조적인 해법이 필요함을 말했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꽉 짜이면서 치고 나갈 ‘틈’이 사라지고 있다. 있었던 문은 좁아지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에게도 존재했던 기회의 영역은 축소되고 있다. 각종 ‘경제, 문화, 상징 자본'을 소유한 자들에게로 세습 형태의 대물림이 공고화되는 추세가 적나라해지고 있다. 전면적인 개입이나 물갈이(reshuffle) 수준의 기존 질서를 흔드는 대안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도 싶다. 다수 젊은이의 포기와 체념으로 이루어진 사회에 미래가 있는가. 역동적인 사회를 다시 그려보고 실현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개인 차원의 노력과 돌파에는 한계가 있는 구조적인 문제다. 사회에 나온 지 꽤 되었어도 여전히 밟아나갈 인생길의 지반이 허약하고 무르게 느껴진다. 뿌옇게 펼쳐진 앞날을 볼 때면 막연하고 초조하다. 점점 더 특정 세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급변하는 고용과 일의 형태를 볼 때, 살면서 여러 번 일터나 직업이 바뀌는 데 익숙해져야 하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추세인듯하다.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위험과 불확실성도 가중되고 있다.
현상 자체가 현실을 바꾸진 않는다. 의견과 필요들이 표출되고 여론을 형성하며 나아가서는 제도를 바꾸고 시스템을 만들어야 변화가 오는 건 유효하다. 이를테면 복지제도의 확충은 각개격파식 경쟁과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나타나는 삶의 불안을 경감해주는, 국가와 사회 차원의 의지를 담은 개입이자 공동의 안전망을 만드는 수단이다. 당장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라도 있으면 조금이나마 숨통은 트이겠다.
그 정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의 말들을 차례차례 수첩에 적었다. “내가 다 해주겠다” 이런 오버하는 멘트는 없었는데, 그러한 담백함은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보다야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요직으로 가시던데, 그날 우리의 말을 잘 기억하고 간직하며 뭐 하나라도 바뀌는 방향으로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우물쭈물 마흔이 가까워지고 있다. 아일랜드 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새겨진 문구. 이 말이 미래가 되지 않길 바란다. 확실한 건 스펙이나 이미지 자체가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주어진 현실과 구조 속에서 어떻게 오늘을 살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에게로 던져진다.
[‘불안’과의 투쟁, 다음 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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