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주역이 되는 거야

마흔의 반격도 늦지는 않았다

by 이웃주민

연재 15


밤늦게까지 함께 있던 사람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 어딘가 허전하고 쓸쓸하다. 술 한 잔이 생각나는데 마땅히 함께 할 사람은 없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 4캔을 골라 들었다. 홀짝 한 캔을 금세 비우고는, 부족해서 한 캔을 더 마셨다. 약간 취기가 올랐고, 요즘 드는 상념을 떠올린다.


고작 나이 조금(?) 드는 게 뭐라고, 숫자 넘어가는 거에 이렇게 민감하게 감정의 굴곡을 겪고 있을까. 내가 아직 완전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오후에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그 옛날 어릴 적 휴대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듣던 노래가 어느 카페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아직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프라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마로니에, ‘칵테일 사랑’)


순수함은 조롱받는 시대다. 내가 순수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고 속물일 때도 많겠지만, 그러나 여전히 난 세상 물정 모르는 듯 맑게 빛나는 눈을 가진 사람이 좋다. 대가 없는 만남을 원하고 조건 없이 맞이하는 공간, 분위기, 사람이 정겹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 생각대로 몸으로 실천하는 삶’이 여러 면에서 쉽지 않음이 느껴지지만, 나 역시 물들어가고 사용하는 말, 관념, 습관도 그렇게 되어감이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체감되지만, 여전히 인간적인 것들에 목마르고 대안의 삶을 갈망한다.


주위를 둘러본다. 사람들은 물론 나조차도 온통 쓰는 언어들이 거래 관계, 기브 앤 테이크, 비즈니스화 되어가고 있다. 사회활동과 작은 모임도 ‘프로젝트'화 되어간다. 자연스러움보다는 반짝 눈에띄는 화려함, 자극, 과장된 언사로 오버액션하듯 한껏 치장해야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관심을 이끌고 터치와 클릭을 유도한다. 돈을 지불해야 한다. 소비를 통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세상이 무비판적으로 일상을 장악해나가고 있다. 나도 그렇게 소비 인간으로 살아가는 도시의 소시민일 뿐이다.


나, 함께, 주역


젊은 날 즐겨 듣던 가수 중 하나는 루시드폴이었다. 그가 부른 노랫말, “사람보다 돈이 중요한 세상이 됐어” 그러나 “통장의 액수 아파트의 평수가 행복을 측정하는 기준이 아니야” 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돈은 필요하다. 그러나 도시와 동네, 사는 곳 주위에는 돈 없이 공짜로 드나들고 누구나 격의 없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숨통을 트고 있어야 진실된 만남과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온 시대는 돈의 논리로 다른 모든 것을 축소해왔다. 그렇게 “눈을 가리는 마음을 가리는 세상이지만…”, 결국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하지만 사회란 무엇인가
우리 개개인으로 이루어진 공동단체
고로 말하자면 우리가 이 사회를 바꾸려면 자신부터 바꿔 가는 거야
스스로의 혁명을 이루어봐, 비인간적인 현실을 개척을 해 나가

그래 바로 너 주역이 되는 거야
바로 윤석이도 주역이 되는 거야
바로 정찬이도 주역이 되는 거야
우리 모두 우리 모두”

새천년 밀레니얼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발매한 루시드폴 1집 수록곡(Take 1)이다. 서정시같은 노래를 주로 부르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랩으로 요요, 야야 거리며 이루어진 노래. 서른 살 조금 넘어서 마을만들기 일을 시작할 때,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던 길에 이어폰 꼽고 자주 듣던 노랫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마을(로컬, 커뮤니티) 만들기는 그러했다. 스스로 주역이 되는 것이다. 너무도 익숙해진 소비자, 유권자, 대리인간, 관객으로서의 수동적 자아를 넘어보는 공간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스타, ‘인플루언서’들을 우러러 구경만 하고 가상 이미지를 동경하며 사는 것이 아닌, 자기가 놓인 자리, 시공간,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나로서 존재하며 살아보자는 것이다.


내가 다는 아니다. 간혹 나는 ‘나’를 지나치게 유행처럼 강조하는 책과 글들이 불편하다. 개별성의 쟁취는 우리사회의 해묵은 과제이지만, 자유로운 나를 찾는 여정은 결코 아직 멈출 수 없지만, 나에게만 잔뜩 영양 강화주사를 주입하는 형태의 자아팽창은 자유의 길이 아니다. 나다운 삶은 나 혼자만으로 이룰 수 없다. 나와 너의 연결과 만남 속에서 온전한 내가 될 수 있고 자유는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개념이자 실체이다.


그렇기에 자유롭고 수평적이며 느슨하면서도 때론 강고한 연대를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로컬(마을)과 협동조합 등의 대안에 매료되었음이 분명하다. 소외되지 않는 일상을 위해 타인과 연대하는 것. 관계 속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에너지들을 회복하고 획득하는 것. 조금 어설프고 못해도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 슬리퍼 신고 만나는 가벼운 모임부터 중대 사안에 대한 결정까지, 참여하는 ‘주역’으로서의 터전을 넓혀가기.


소수만 우대하고 우러러 보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다수의 존재가 모멸받거나 방치되거나 병들어가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마음돌봄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줄세우기와 상대평가 말고 기준을 다양화하거나 허물어버리는 절대평가도 필요하다. 자리를 떠나서는 하대받는 사회도 건강하지 않다. 계약 관계를 넘어서는 친구, 이웃, 스스럼 없이 다가갈 수 있는 평범하고 특별한 사람이 곁에 필요하다. 이는 직함, 지위, 자격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오늘을 산다


“누구나 연단에 오를 수 있다. 노래를 하든, 춤을 추든,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다. 의자와 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없는 곳. 빽빽한 도시 안의 둥근 구멍들. 그게 내 기획의 초점이었다.” - 손원평, '서른의 반격’


지혜(주인공)는 사회의 꽉 짜인 허위와 농락 구조에서 왜소하게 살아가는 88만원 세대 청년이었다. 끽소리 한번 못 내며 억눌려있던 그녀는 전혀 영웅적이지는 않은 평범한 ‘변화의 주역’이 되어간다. 작가는 “반격이 먹히지 않아도 마음속에 심지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들로 작품을 썼다고 했다. 우연히 만난 ‘사회의 잉여들’과 힘을 합쳐 결행한 전사 같지도 비장하지도 않은 엉뚱하고 유쾌한 저항들, 그리고 지혜는 내면의 심지를 결국 ‘정말, 진짜, 우리’라는 VIP석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기획으로 불 붙였다.


지혜에게 그날은 처음이었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경계를 허물고 모두가 참여하는 도시 속 공간을 여러 개 만들고 싶었다. 그렇기에 그날 무대는 끝이 아니다. 지향을 실현하는 ‘과정’에서의 첫날이다. 우리는 과정을, 오늘을 산다. 알면서도 자주 이탈해있다. 나의 조바심은 결국 또 되풀이하고 있는 불안의 상념이다. 인생을 결과론으로 본 대서 비롯되었다. 결과만을 놓고 보면 매 순간은 완전하지 못하고 불안정하다. 목표 지점을 바라보며 괴로움도 걱정도 고통도 참고 감내하며 오르고 달려야 한다.


마흔 쯤 되었으면, 지리산 등반으로 따지면 그래도 노고단 어디쯤 누구라도 알만한 명소가 보이는 고원 까지는 도달했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은 결과가 다가 아니다. 종점만을 향해 다른 걸 다 포기하고 달려가는 결전의 장도 아니다. 매 순간의 과정이 꽉 차고 후회 없으며, 옆 사람도 살필 줄 알고 스스로도 즐거울 수 있어야 한다.


앞길이 환하게 보이거나 뚜렷하진 않다. 그러나 공기 속으로 맥없이 증발되어버리기는 아직 많이 이르다.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버리는 삶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점잖고 중후한 불혹이 되어 경로를 확정 지어버리는 인생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조직의 사다리를 오르고 올라 꼭대기에 도달하는 일직선의 진로를 꿈꾸는 것도 아니다. 자리가 나를 말해주는 삶을 살고 싶지도 않다. ‘서른의 반격’을 제대로 못했으면 마흔의 반격도 늦지는 않았다.


[다음 편, 마지막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

대문사진 출처: https://publy.co/set/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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