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노 Apr 16. 2021

[칼럼] 사이코보단 빈센조가 더 좋아요

드라마 <빈센조>

내가 중학생일 때였다. 하굣길에 몇몇 선배들로부터 돈을 뜯겼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무슨 용기가 있었는지 그들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갈 리가 있나. 선배 무리는 나를 끈질기게 따라오며 돈을 요구했다. 물론 나는 그들을 계속 무시했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열을 뻗쳤는지 내 뺨을 때렸다.


다행이도 주변 행인들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는 금방 벗어났다. 하지만 이 경험은 어린 내겐 꽤 충격적이었다. 분한 마음도 있었다. 되갚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곧바로 어른들에게 알렸다. 어른들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생을 재학생이 건드린 일이니 학교 입장에서도 꽤 난감했을 것이다.


결국 이 일은 나를 때린 선배와 그 선배의 부모가 내게 직접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인 그들을 보니 기묘한 쾌감이 일었다. 이후 그 선배를 만난 적은 없었다. 복수랍시고 그가 내게 따로 해를 가한 일도 없었다(돌이켜보면 그 인간도 악질은 못 되었던 듯하다). 어느 봄날에 벌어진 잠깐의 해프닝이었다.



요즘 드라마 <빈센조>가 인기다. <빈센조>는 전직 마피아였던 주인공이 한국으로 돌아와 악당의 방식으로 악당들을 응징하는 내용의 드라마다. 시청률도 꽤 잘 나온다. 2021년 4월 10일 기준, 10.3%가 나왔다. 낮은 숫자처럼 보이지만 요즘처럼 TV 프로그램들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에 시청률 10%면 준수한 편이다. 심지어 <빈센조>의 동시간대 경쟁작이 그 유명한 <팬트하우스>라는 걸 감안하면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 십수 년도 더 된 그때의 일이 떠오른 건 대관절 무슨 이유였을까.



지난 8월 종영한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정신 병동을 배경으로 두 형제와 한 여자의 성장기를 다룬 드라마다. 정신 병동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드러내는 동시에 서로에게 위로를 전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감동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드라마가 참 슬프다. 물론 이 드라마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주인공들은 각자를 옭아매던 굴레를 던져버리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간다. 그러나 그 여정엔 서글픈 진실도 동행한다. 그러니까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료해 줄 수 있는 건 똑같이 마음이 아픈 사람들 뿐이라는 것이다. 강태와 상태, 그리고 문영과 괜찮은 정신병원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자가 되어주지만,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그들은 여전히 이상하고 위험하다. 결국 그들끼리의 위로고, 그들끼리의 연대였던 셈이다.


물론 그들의 연대가 가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연대는 내력을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는 힘, 웃으며 버틸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연대를 둘러싼 바깥의 현실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연대를 넘어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빈센조>는 의미심장하다. <빈센조>는 전형적인 히어로물의 한 갈래처럼 보인다. 유능한 주인공이 약자들을 도와 악당의 방법으로 세상에 통쾌한 한 방을 가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빈센조>를 단순히 히어로물의 일종으로만 보면 곤란하다. 여기에는 여타 히어로물과는 다른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금가프라자 사람들’이다.


드라마 초반, 금가프라자 사람들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약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용역들에게 시달리는가 하면, 당장 오늘 밤에 건물을 밀어버린다고 하는데도 이렇다 할 대책도 없이 발만 동동 구른다. 심지어 교통사고를 당하고 겨우 돌아온 빈센조에게 당신을 믿지 못하겠다며 추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금가프라자 사람들이 변한다. 빈센조를 도와 바벨 그룹을 곤란하게 만들더니 나중엔 빈센조의 집에 침입한 괴한들을 직접 물리치기도 한다. 나아가 건물로 몰려든 용역들에게 맞서 싸우며 그들로부터 금가프라자를 지켜내기까지 한다. 드라마 초반에 보여준 금가프라자 사람들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나아가 한 명의 히어로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약자들이 직접 자신들을 괴롭히는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모습은 드라마가 선사하는 통쾌함을 배로 만들어준다.




“그러니 앞으로 어느 누구든 너를 해하려 하면 울기보단 물기를 택하렴.”
-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中에서 -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손님에게 추행을 당하던 여급을 구해준 쿠도 히나는 여급에게 이렇게 말했다. 멋진 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


연대는 내력을 만들고, 행동은 바깥의 벽을 부순다. 서로를 향한 공감과 위로가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기 위해선 물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빈센조>의 금가프라자 사람들은 바벨에게 맞서 싸웠고, <웃는 남자>의 그윈 플렌은 귀족들의 위선과 폭정을 조롱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드라마나 뮤지컬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1) 트럭 시위


지난 2월, 한 게임사(넷마블)의 안일한 운영 형태에 불만을 품은 게이머(페이트 그랜드 오더의 유저)들이 게임사를 비판하는 마음을 담아 트럭을 보냈다. 돌이켜 보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었지만 의외로 게임사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뒤늦게나마 유저들에게 소통을 하자며 부랴부랴 손을 내민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다른 게임들의 유저들에게도 곧장 영향을 주었다. 마비노기를 비롯해 메이플 스토리,H2, 클로저스 등의 유저들이 그동안 쌓인 불만들을 표출하며 잇달아 트럭을 보냈다. 이러한 유저들의 공세에 3N 중 하나인 넥슨은 이례적으로 자사 게임에서 서비스하는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을 공개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도 반응했다. ‘바다 이야기’ 사태 이후 무려 십수 년만에 게임법 개정이란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한편 이러한 상황들을 보고 있노라면 의문도 함께 떠오른다. 사실 게임사의 운영 논란은 이전부터 있어 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유저들의 불만은 수많은 해프닝 중에 하나로 취급받아왔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달랐다. 유저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게임사에 대응했고, 이러한 게이머들의 움직임에 여론이 반응하자 게임사 들은 부랴부랴 게이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에는 이전과 달라진 게이머들의 인식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한 유튜버는 이번 사태를 보며 이렇게 토로했다. 도대체 어느 업계에서 고객을 이렇게 대하는가. 과거 게임은 주류 어른들로부터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취급받았다. 당연히 게이머도 하찮은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게이머들이 게임사에 어떤 불만을 가지든 간에 그 불만은 공감과 설득력을 별로 얻지 못했다. 잘못을 한 건 게임사 쪽인데 오히려 게이머가 욕을 먹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어른들에게 꾸중을 들어가며 게임을 하던 아이들이 사회의 주류로 등장했다. 그러자 게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게이머들이 이제껏 의식하지 못했던 ‘고객으로서의 자아’도 함께 일깨웠다. 이제 게이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트럭을 보내 시위를 하고, 불매 운동을 전개한다. 간담회를 열어 직접 게임사를 초대하기도 한다. 게임사와 게이머 간의 갑과 을의 관계가 드디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2) 게임스탑


게임스탑은 미국의 비디오 게임 판매점 브랜드다. 한때는 전 세계에 6000개가 넘는 점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게임 판매점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모두 지난 일이다. 게임의 판도가 PC와 모바일로 넘어가면서 비디오 게임은 마니아들이나 찾는 퇴물 취급을 받았다. 그러자 게임스탑도 자연스레 힘을 잃었다. 하나 둘 폐점하는 점포가 늘더니 주가도 떨어졌다. 그렇게 한때는 반짝였던, 그저 그런 회사들 중 하나로 기억될 처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5의 출시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콘솔 게임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게임스탑에는 다시 사람들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던 주가 역시 반등하기 시작했다. 미국 내 커뮤니티에는 게임스탑에 투자를 했더니 이득을 봤다는 후기들이 쏟아졌다. 한순간에 망하기 일보 직전의 기업에서 투자계의 뜨거운 감자가 된 것이다.


한편 이러한 게임스탑의 급격한 성장을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뉴욕 월스트리트의 헤지펀드 세력이다. 우리에겐 대표적인 공매도 세력으로 익숙한 곳이다.


결국 게임스탑을 공매도의 타겟으로 삼기로 결정한 헤지펀드 세력은 게임스탑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자신들이 가진 자본과 영향력을 활용해 게임스탑의 주가가 지나치게 고평가 되어 있다며 여론을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개인투자자, 일명 개미들은 곧장 분노했다. 졸지에 돈을 잃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개미들의 분노에는 보다 복합적인 요인이 존재한다. 우선 게임스탑은 미국의 게이머들에겐 유년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그런 곳을 헤지펀드라는 것들이 망가뜨리는 걸 결코 두고 볼 순 없었을 것이다. 또한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겪으며 암울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미국의 청년들에겐 이번에도 대중의 희생을 통해 돈을 벌려는 헤지펀드가 악당처럼 보였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개인투자자들은 들고 일어섰다. 헤지펀드 세력에 맞서 게임스탑의 주식을 미친 듯이 매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초반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싸움의 결말을 헤지펀드의 승리로 예상했다. 아무리 개미들이 뭉치고 단결한들, 헤지펀드가 가진 자본력과 영향력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을 깨고 게임스탑의 주가는 끝을 모르고 솟구쳤다. 로빈후드 어플 등을 비롯해 몇몇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게임스탑의 주가를  최고 500달러까지 올려놓으며 공매도를 한 헤지펀드 세력들에게 어마어마한 손해를 입힌 것이다. 일부 공매도 세력은 천문학적 손실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을 선언하기도 했다.


물론 이번 게임스탑의 사례가 개미들의 완벽한 승리라고 보기엔 어렵다. 2021년 4월 14일 오전 9시 기준, 게임스탑의 주가는 140달러 안팎이다. 1주에 500달러까지 올랐던 지난 1월과 비교하면 주가가 상당히 떨어졌다. 이는 사람들의 관심이 빠르게 식어가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버텨온 공매도 세력들에겐 호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미들이 보여준 반격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지난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는 시위가 한창일 때도 월가의 1%는 99%의 목소리를 구경거리로 치부하며 조롱하고 즐겼다. 그런 그들에게 99%의 사람들이 무려 10년 만에, 1%들의 방법을 활용하여 복수를 성공한 것이다.



(3) #Stop Asian Hate


지난해 5월, 조지 플로이드라는 미국 남성이 경찰들의 과잉진압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Black lives matter’이라는 구호와 함께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플로이드가 사망한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이 시점에도 미국은 여전히  차별과 싸우고 있다. 이번엔 아시아인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사실 아시아인들 역시 흑인 못지않게 인종차별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서구 사회 내 아시아인들을 향한 혐오 정서는 더욱 깊어졌다. 뉴스에는 아시아인들을 겨냥한 묻지 마 폭력 사건에 대한 기사가 연일 쏟아지고, 심지어 미국 애틀랜타에서는 아시아인들을 겨냥한 총격 사건까지 벌어졌다. 오죽하면 바이든 행정부가 아사아인에 대한 혐오 행위를 중단하라는 행정명령까지 발동시켰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 내에서 아시아인들은 여전히 혐오에 노출되어 있다. 2주 전엔 뉴욕 지하철에서 한 흑인이 아시아인을 기절할 때까지 무자비하게 폭행하기도 했다. 지하철 내 승객들은 이를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환호를 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의 손흥민 선수 역시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이후, SNS를 통해 개고기나 먹으라는 둥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아시아인들 역시 거리로 나섰다.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도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보태며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물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미국에서 심심치 않게 이슈로 다뤄왔던 흑인들에 대한 인권 문제도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 시위를 통해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던 아시아들이 정면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만큼은 고무적이고 희망적이다. 원래 세상은 이렇게 조금씩, 느리지만 확실하게 변해가는 법이니까.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3369


작가의 이전글 [칼럼] 이제 넥슨과 놀지 마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