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1. (D-84)
“아무리 길고양이라도 함부로 죽이면 안 되지 않냐?”
어느 날의 점심시간 와중이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직원이 내게 이렇게 물어왔다. 당연한 소리를 무슨 이유로 묻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주차장에서 나뒹굴며 놀고 있는 우리의 새로운 식구를 두고 일컫는 말인가 싶기도 했다.
“예. 아마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처벌 받을 겁니다.”
동물보호법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튀어나올 법한 문장을 나는 대답으로 골랐다. 그러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그치? 그게 맞는 거지? 마치 그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이다.
사연인즉, 이랬다. 교대점검이 막 끝난 참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출동을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지령서가 센터로 전송 되었다. 동물구조 출동이었다. 신고자의 말에 따르면 며칠 전 자신을 물고 도망갔던 길고양이가 다시 나타났으니 소방서에서 조치를 취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장에 출동을 한 직원들은 곧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고양이를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문 구조대원도 아닌데다가, 고작 2명만으로는 사지 멀쩡한 재빠른 녀석을 쫓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구조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꿩 대신 닭이라고 직원들은 하다못해 고양이를 신고자가 있는 곳에서 멀리 내쫓기라도 해보자고 결정하였다. 한편 신고자는 그런 직원들을 보면서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소방서에 신고하지도 않았겠죠.”
그게 무슨 소리냐고 소방관들이 물었다. 그러자 신고자는 대답했다.
“다시는 오지 못하게 처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데려가든, 아님 잡아죽이든 간에?”
지난 9월,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퓨마가 탈출한 사건이 발생했다. 4시간 반에 걸친 숨 막히는 추격전 끝에 퓨마는 결국 사살된 채로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곧장 분노했다. 청와대의 국민청원란에는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담당자의 처벌과 나아가 동물원의 폐지를 요구하는 글들이 잇따랐다(하지만 이 글에서는 동물원에 대한 나의 견해를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다만 의문스럽기는 하다. 보호와 교육적 목적을 주장하면서 왜 항상 동물원의 곁에는 놀이공원 같은 위락시설이 동반하고, 조금 규모가 있다 싶은 수족관에는 돌고래쇼나 물개쇼가 따라붙는지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건의 과정을 돌아보면 찝찝한 구석이 한 두개가 아니다. 우선 우리에 갇혀 있었어야 할 퓨마가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육사가 해당 우리를 청소 후에 문단속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최초의 원인 제공은 인간에게 있는 셈이다. 또한 퓨마가 사살을 할 정도로 정말 위협적이었는지에 관한 의문도 있다. 최초발견 당시에 퓨마는 배수로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기고 있었으며 사살당하기 진전까지도 동물원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국은 날이 어두워지면 추적이 어렵다는 이유로 마취총을 한 발 더 쏘는 대신에 실탄을 끼워 넣기로 결정하였다. 심지어 동물원에서는 운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관리시설에 대해 소홀히 하였다는 정황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니 이 사건에는 전적으로 인간의 과실이 크다. 그리고 인간의 실수로 발생한 사고 때문에 평생을 인간의 욕망에 의해 이용 당해온 퓨마는 인간의 안전을 위해 죽임을 당했다. 퓨마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간을 위해 희생하기를 강요당한 것이다.
물론 시민의 안전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궁금할 따름이다. 인간의 실수 때문에 ‘퓨마’는 목숨을 잃었는데, 실수를 한 ‘인간’은 과연 무엇을 잃게 될 지를 말이다.
자신을 물고 달아난 길고양이를 죽여 달라며 부탁한 신고자의 경우는 어떠한가. 통계를 보면 현재 길고양이의 개체 수는 약 100만 마리에 달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에 누군가는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며 주장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로 인해 삶의 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며 걱정한다. 신고자는 아마도 후자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의견에는 일리가 있다. 나 역시도 인간과 동물의 권리가 충돌하는 상황이 온다면 인간의 편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갈 중대한 오류들이 존재한다. 우선 어째서 길고양이의 개체 수가 과거에 비해 폭발적으로 늘어났는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동물을 유기하는 행위에 있어서 인간의 실수와 고의가 절대적으로 작용한다. 많이 버리니까 늘어날 수밖에.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걱정하는 소위 ‘삶의 질’이란 것이 오로지 인간만의 관점을 반영한다는 문제도 있다. 거기에는 고양이만의 영역 체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 논리에는 불공정성이 틈입하고 마는 것이다. 가령 신고자는 고양이가 자기를 공격했다고 하지만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신고자의 어떤 행동이 고양이가 그를 공격하도록 촉발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그러한 사실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동물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장한다면, 다른 이들은 그것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며 반발한다. 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난민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발언 뒤에는 자국민에 대한 관심이나 키우라는 비아냥이 따라오고,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의 반박으로 남성이 겪는 역차별이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는 내가 아닌 남이 나보다 잘난 꼴을 차리는 걸 죽어도 볼 수 없는 본능을 타고 난 모양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초점은 누가 먼저 위치하느냐가 아니다. 이건 누구 하나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자는 이야기인 것이다. 말하자면 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다른 문제의 방치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묻고, 그 대답을 생각해야 한다. 한 존재의 편의를 위해 다른 존재의 희생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리고 여기 좋은 선례가 있다.
1961년 이스라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이 열렸다. 그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편에 서서 유대인학살정책(홀로코스트)을 수행한 인물이다. 8개월에 걸친 긴 공판 끝에 재판부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다음의 견해를 밝혔다.
“논증을 위해서 피고인이 대량학살을 위한 조직체에서 기꺼이 움직인 하나의 도구가 되었던 것은 단지 불운에 불과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피고인이 대량학살정책을 수행했고, 따라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정책을 피고인이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인과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1920년대 당시, 1차세계대전의 패배와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혼란이 극에 달하던 독일의 나치당(히틀러)은 절망에 빠진 국민들을 일으켜 하나로 단결시키고 현실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반유대주의를 이용했다. 그들은 독일 국민들이 겪는 패배감의 원인과 사회적 불만을 유대인의 소행으로 몰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서 막대한 자본을 착취하였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유대인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심지어 그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갖가지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갖다 붙였다. 그리고 그 결과, 인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났다.
혹시 이것은 나의 비약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이스라엘 재판부가 아이히만의 사형 판결을 두고 밝혔던 견해처럼 한 개인(혹은 집단)이 다른 집단과 더불어 살기를 포기했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 신고자를 우연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2달 전 쯤이었을까. 어느 주택가에서 발생한 화재현장에 출동한 적이 있었다. 다행이도 집주인은 소방관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집밖으로 탈출한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그녀가 키우는 반려견들이 아직 불길 속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제발 녀석들을 구해달라며 간곡하게 사정하는 그녀를 보면서 소방관들은 난감한 고민에 빠졌다. 불길은 맹렬했고 소방관들의 안전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제공된 답안의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몇 마리의 ‘개’일지 몰라도 어떤 이에겐 지난한 세월을 함께 걸어온 소중한 '가족'이었을테니 말이다. 결국 소방관들은 불길로 가득한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윽고 뜨거운 열기를 해치고 탈출한 소방관들의 품에는 검댕으로 범벅이 된 강아지들이 들려 있었다. 모두 합해서 5마리. 다행이도 다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 그들은 그렇게 총 여섯의 목숨을 구했다.
구조행위에는 어떠한 가치평가도 개입하지 않는다. 한쪽을 위해 다른 쪽을 희생시키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불가피한 순간일 때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소방관의 직업윤리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이 신고자가 고양이의 죽음을 소방관에게 요구할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동물구조 출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방’이라는 조직에서 이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제 아시겠느냐. 당신이 그 고양이를 죽여 달라며 부탁을 건넨 사람들은 불과 2달 전, 다섯 마리의 강아지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내걸었던 이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따라서 그런 당신의 부탁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도 함께 말이다.
사진출처: http://www.bloter.net/archives/214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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