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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Mar 14. 2022

*그들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책이 벽면을 모두 채운 서재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학생이던 시절부터 사 모은 책들은 자꾸만 늘어서 키 큰 책꽂이 서너 개를 채우고도 모자랐다. 책이 하도 많아 마루가 내려앉았다는 장서가의 이야기가 무용담으로 들릴 만큼 책 욕심이 꽤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되었던 90년대 중후반의 노래며 책을 잘 알지 못한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가장 노래를 듣지 않았고,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것이다. 책 한 권 사보는 것보다 더 시급한 지출이 있었고, 책 한 권 읽을 마음의 여유는 부족했던 시기가 그때였다.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했던 때가 그때였다.    

 

 더 이상 늦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해보자는 마음으로 출판 강의를 들으러 다니고, 글쓰기 모임에 나갔다. 어느 수업에 가서 앉아도 내 또래는 드물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를 포함해 애를 셋 키우는 젊은 주부는 서울까지 강좌를 들으러 다니며 책을 엮었다고 했다. 출판 강의를 들으러 오는 토요일, 맡길 곳 없는 아이 손을 붙잡고 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바빠서, 라는 것은 핑계였는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한 발자국 뗄 용기와 고개를 들어 좀더 멀리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모자랐던 것 아닐까.      


 책은 집에 여전히 쌓여있었다. 일 년 이상 찾지 않고, 쓰지 않는 물건은 바로 버리거나 정리하는 내게, 책이란 그런 것이었다. 오랜 시간 다시 펼쳐보는 일이 거의 없어도 선뜻 버릴 수는 없는 것 말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두 분이 사시던 집을 모두 비워야 했으므로 그 모든 것들을 정리했다. 매일 치우고 버렸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더러 집으로 가지고 오기도 했다. 버려진 것들이 부모님께 소중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주인을 잃은 물건은 그저 버려졌다.

그것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내게 소중한 것들 역시 나에게만 소중한 것이다. 결국 나 역시 오래도록 가지고 있던 묵은 책들을 정리했다. 키 큰 책꽂이 서너 개의 책들은 모두 기증하거나 나눠주었고, 그마저도 불가능한 것들은 내놓았다. 하나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두 정리하고 나니 남겨진 것은 몇 권 되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났다. 그 이후에 나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는다.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도 하고, 종종 가는 서점에서 사기도 한다. 한 달이면 이십 권이 넘는 책을 읽지만, 서재에 책은 거의 쌓이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돌려주며, 구입한 책은 읽고 나서 주변에 모두 나누어 준다. 이제 서재의 책이라곤 간혹 내 글이 실린 단행본이거나, 저자 친필 사인을 받은 책 몇 권뿐이다. 그러니 굳이 책장이 따로 필요하지도 않다.      

 책의 순환에 대해서 생각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돼지 저금통 속의 동전과도 같다. 돼지저금통을 부수고 나온 한 무더기의 동전들은 지폐로 바뀌거나, 통장의 숫자로 찍히며 비로소 쓰임새를 갖는다. 그 이전까지는 그저 돼지저금통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서재의 책장에 꽂아두었던 책들 역시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그저 나를 바라만 보았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내가 그랬듯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채 함께 두근대는 밤을 보내는 것을 상상해본다. 책장에 꽂혀 장식으로 존재하는 책이 아닌,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글로 존재하는 시간을 꿈꾸어보는 것이다.      

 오늘 내가 도서관 서고에서, 혹은 서점에서 뽑아온 책들을 본다. 이들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내가 읽은 그 많은 책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많은 이곳저곳의 책장에 옮겨다니길 바란다. 머무르지 않는 바람같이 그들이 자유로웠으면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내 손을 떠난 책을 다시 만난다면, 그들이 나에게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았으면 좋겠다. 



*와글와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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