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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Mar 07. 2022

*커피를 마실 때

 어렸을 때 엄마 친구분들은 우리집에 종종 모였다. 엄마는 과일을 깎고, 커피를 대접했다. 나는 깎아놓은 과일을 손님상에 내기도 전에 슬쩍 한두 개씩 먼저 집어먹어 늘 혼났다. 그래도 언제나 엄마 옆에 붙어 앉아 커피를 타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엄마는 아끼는 커피잔 세트를 꺼내어 초이스커피, 프리마, 그리고 설탕을 넣고 전기포트의 끓인 물을 부었다. 엄마와 엄마 친구들은 커피를 마시며 오후 내내 무척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커피를 그렇게나 좋아하던 엄마는 동생이 죽고 나서부터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이유 없이 가슴이 뛰고, 숨이 꽉 막혀온다고 진땀을 뻘뻘 흘렸다. 병원에서도 딱히 병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의사 권고대로 커피를 끊었다. 시간이 약이었을까. 엄마의 증세는 점차 나아졌지만 커피를 마시지 않게 된 엄마는, 이제 딱히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젊었던 엄마처럼, 나도 커피를 무척 좋아한다. 길 건너 부모님 댁에 매일 드나들었다. 살림꾼인 엄마 주방엔 온갖 음식 재료가 다 있으나, 원두커피는 없었다. 대신 엄마는 늘 커피믹스를 사다 놓았다. 막상 당신은 드시지도 않는 커피였지만 말이다. “우리 집 커피는 너 때문에 사다 놓는다.”라고 하시며 함께 마트에 가면 어떤 커피가 맛있는 거냐고 물으셨다.

나는 “믹스가 뭐, 다 거기서 거기지.” 툴툴거리면서도 제일 맛있는 커피를 집어 엄마 카트에 무심하게 툭, 넣곤 했다. 그리고 부모님 댁에선 늘 그 커피믹스를 한 잔씩 마셨다.     


 부모님이 계셨고, 건강하시던 시절, 우리 가족은 강원도 여행을 떠났다. 딸아이까지 다섯 명, 삼대가 떠난 여행이었다. 횡성, 한계령을 거쳐 강릉의 마지막 코스로 카페 테라로사를 찾아갔다. 인가도 드문 시골길로 들어서자 부모님은 커피집을 간다며 왜 자꾸 농사짓는 데로만 가느냐고 웃으셨다.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간 마을 안쪽, 마치 유럽의 어느 시골쯤에 있으면 어울릴법한 큰 목조주택이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입구의 작은 뜰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통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가장 안쪽 테라스 자리에 앉으니 뒤편으로 작은 연못이 딸린 푸른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날,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자리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사람들이 많았고, 사방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지만, 바라보는 정원의 풍경만큼은 호젓했다. 그날, 집에 돌아오며 이번 여행에서 어디가 제일 좋으셨냐 했더니 엄마가 웃었다. 

"나는 그 '다방'이 제일 좋더라." 

엄마는 이후에도 강릉의 그 '다방' 이야기를 종종 했는데, 다음에 또 같이 가자 했지만, 그 '다음'은 영영 올 수 없게 되었다.      


 커피를 끊었던 엄마는 요양병원에 입원해서부터 커피믹스를 한 잔씩 드셨다.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고, 그마저도 엄마 표현을 빌리면 ‘깡패같이 밀어 넣어’ 겨우 먹이는 수준이었다. 대신 달달한 커피믹스 한잔은 유일하게 엄마가 달라고 한 음식이었다. 

엄마 병상 끝에 앉아 억지로 밥을 먹이고는 둘이 커피믹스 한 잔씩을 마셨다. 병세가 깊어진 엄마는 기력이 없어 손을 덜덜 떨며 커피를 마셨다. 겨우 아기들이나 먹을 만큼의 음식을 힘겹게 먹이고 나선, 그렇게 매일 엄마와의 짧은 티타임을 가졌다. 그리고는 오후에 출근했다. 엄마를, 그리고 옆 병실에 아빠를 남겨둔 채로 말이다. 

매일 병원의 부모님을 들여다보며 겨울이 갔고, 봄이 왔고, 5월이 되자 두 분은 이십여 일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돌아올수 없는 먼길을 떠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그다음 해 친구들과 강릉의 테라로사를 다시 갔다. 초행이라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그때 여행에서 제일 좋다고 했던 '다방'이야." 

그런데 도착해보니 그 '다방'이 없어졌다. 물론 정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다방은 도시의 브런치 카페처럼 커다란 덩치를 가진 테라로사가 되었다. 그 목가적이던 테라로사는 어디 간 거지. 나는 그만 당황했다. 직원을 잡고 물어보았다. 

"예전 테라로사는 없어졌나요?"

다행히 건물 뒤 예전 테라스 좌석에서 바라보았던 정원이 그대로 있었다. 거대한 새 건물을 지나 연못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니 '시골 다방' 테라로사의 옛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이제 카페로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반가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이후에도 나는 테라로사를 갈 때마다 정원의 나무다리를 건너가 옛 테라로사 건물을 물끄러미 보고 온다. 예전과는 반대 방향인 나무다리 끝에 서서 옛 테라로사의 그 테라스 쪽을 바라본다. 어쩐지 부모님은 여전히 그 테라스 자리에 앉아 푸른 정원을, 그리고 그 건너편 지금의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곤 하는 순간이다.      


 연이은 부모님의 죽음을 접했다고 해서 죽음이 특별히 더 무서워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쯤은 삶이 우스워진 것도 물론 아니다. 나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떠난 이의, 떠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엄마가 병석에서 말했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엄마는 해답을 찾았겠지만, 나에게 이야기해줄 수 없으니 그 질문은 내게 여전히 질문으로 남는다. 

다만 남겨진 나는, 훗날 내가 떠난 이후 남겨진 이들의 마음은 알 것 같다. 함께 하는 많은 시간, 행복한 이야기들이 ‘추억’이거나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함께 할 것임을 이제 안다. 그러니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한마디 건네본다. 

“같이 커피 한잔할래? ”     



*와글와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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