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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l 15. 2022

여름을 걷는 중

                  

“가만히 있으면 하나도 안 더워.”

집에 들어서자마자 “더워, 더워, 에어컨!”하고 외치는 나에게 엄마는 늘 그렇게 말하며 리모컨을 꺼내 들었다. 

“우리만 있을 때는 생전 에어컨 안 틀어. 가만히 있으면 안더운데….”     


열아홉 해를 우리 집 막내로 살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강아지의 이름은 아람이였다. 깍쟁이고 깔끔하기가 여염집 처자 못지않던 녀석은 웬만해선 혀를 빼물고 헉헉대는 법이 없었다. 여름의 한가운데 온도가 한껏 치솟으면 그제야 마루 구석에 몸을 붙인 채 간혹 헉헉거렸다. 우리는 그때가 되면 웃었다.

“쟤가 헉헉대는 걸 보니 진짜 더워졌나 보다.”

아람이는 무지개다리를 앞에 두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혀를 빼물지 않았다. 잠깐 졸고 일어난 새벽, 아람이의 거친 숨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떠나면서도 녀석은 입을 앙다문채였다.

반면 지금 우리의 강아지 루비는 날이 조금만 더워져도 온종일 혀를 빼물고 헉헉댄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뛰었다.

“루비야! 가만히 있어. 이렇게 뛰어다니니까 더 덥지. 가만히 있어 봐. 그럼 하나도 안 더워.”

말하고 나니 그 어느 여름의 엄마가 떠올라서 혼자 피식 웃었다. 이제 엄마는 없고, 나이 먹어가는 나는 언젠가부터 엄마처럼 움직이고, 엄마처럼 말한다.     


여름의 거리는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늘을 찾아 걸었지만, 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개천 변을 걷다 문득 물 위로 펄쩍 뛰는 물고기를 보았다. 이 더위에 물 위의 무언가를 먹겠다고 뛰는 물고기가 있다니.

젊은 시절에 아빠는 낚시를 참 좋아했다. 어느 휴일, 군인이던 아빠는 우리를 데리고 부대 옆의 낚시터에 갔다. 당직을 서고 퇴근한 길이었으므로 군복을 입은 채였는데 한여름 더위에 아빠는 그 차림으로 낚시를 했다. 우리 형제들 역시 그 뙤약볕, 아빠 옆에서 장난을 치며 여름 하루를 보냈다. 나는 그날의 추억을 잡았는데, 아빠는 그날 무슨 물고기를 잡았을까.     


중학생 무렵 방학이면 아빠의 근무지인 경남 사천에 내려가 개학 때가 되어야 올라왔다. 시골의 여름엔 할 일이 없고, 볼 것이 없는 무료함이 가득했지만 나는 시골에 내려간 소설 속 주인공이 된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방학에만 잠깐 내려갔으므로 시골에 친구는 없었다. 여름 내내 마당으로 통한 통창을 활짝 열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선풍기 바람과 마당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엎드린 내 등허리 위로 지나가는 여름이었다.

그해 여름 엄마는 오이지를 담갔다. 여름방학 내내 밥을 물에 말아 그 오이지 무침 하나로 맛있게 먹었다. 엄마는 두고두고 그해 여름의 오이지 이야기를 했다. 그해 여름엔 그 오이지가 참 맛있게 되었다고. 그다음엔 어쩐지 그때만큼 맛있는 오이지가 만들어지지 않더라고 말이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내리꽂히는 여름 한낮이었다. 차들이 분주하게 지나는 아스팔트 도로를 바라보며 가로수 아래로 걸었다. 어린 시절 한여름이면 아스팔트가 녹아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오던 때가 있었다. 요즘 아스팔트를 보며 그것을 떠올린다면 젊은 사람일 리가 없다. 언젠가부터 아스팔트는 더이상 녹지 않고, 여름엔 나무 그늘 대신 에어컨 아래를 찾는다.

지나간 여름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오늘의 여름을 걷는 중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여름이 쌓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이 여름, 좀 더 뜨거워도 좋겠다. 언젠가 더이상 뜨겁지 않은 여름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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