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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Nov 01. 2022

그는 괜찮다고 말한다

1937년생인 그는 누나가 한 명 있는 집의 맏이였다. 그의 위로는 어린 시절 떠돌이 개한테 물려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난 형이 있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할머니가 마당 구석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그의 형을 보고 말했다고 한다.

“개한테 물렸을 때 바로 토끼를 고아 먹이면 나았을 텐데, 이제는 늦었네.”

얼마 후 어린 그의 형이 죽은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그의 어머니는 종종 그 이야기를 했다. “진즉 알았더라면 토끼를 고아 먹여서 살렸을 것을….”     


십 대 소년이 된 그는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다. 집 근처를 지나던 미군 행렬을 겁 없이 따라갔는데 어쩌다 보니 평양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장남이 없어졌다며 그의 어머니는 난리가 났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몇 달 만에야 태연히 집으로 돌아왔다고. 

그의 자식들은 무용담 같은 그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는데 대부분은 그가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한 이야기였으므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군 부대의 ‘하우스 보이’였다던 그를 상상하며 재미있어하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군 사관생도가 되었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이었던 그에게 학비가 들지 않는 사관학교는 별달리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지였다. 생도 시절의 그는 럭비선수이기도 했다. 가족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준 사진 속에서 젊은 사관생도인 그는, 짧게 깎은 머리에 줄무늬 럭비유니폼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흑백사진 속 그의 이십 대는 총천연색 컬러사진보다도 더 빛이 났다.     

임관한 이후엔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하늘을 날았다. 비행훈련을 받을 땐 뒷자리에 앉은 교관이 비행 중에도 헬멧에 주먹질을 해댔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아마 그도 나중에 교관 생활을 할 때는 앞자리에 앉은 훈련생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헬멧에 주먹질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이야기든지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있던 그는, 맞은 이야기만 하고 때린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니 모를 일이다.     


결혼했고, 아이를 셋을 낳고 그도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술을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해서 부인에게 잔소리를 자주 들어가며 나이를 먹어갔다. 소망하던 별을 달지 못하고 대령으로 예편했지만, 그는 여전히 전투기 조종사로 하늘을 날던 ‘빨간 마후라’의 시간을 자랑스러워했다. 조종복과 비행 헬멧, 그리고 훈장이 촘촘히 박힌 공군정복을 서랍 속에 고이 간직했다.     

세 남매 중 작은딸이 결혼했다. 딸과 함께 버진로드를 걸어간 끝에서 인사하는 사위에게 “빨리와, 인마!”라고 해서 웃음을 자아냈는데 훗날 그는 술을 한잔 걸치고 말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랬다고.

딸을 시집보내며 서운한 눈물이 날 뻔했다던 그는, 결국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참담한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의 아들은 입대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영원한 군인으로 남았다. 국립현충원에 아들의 유골함을 묻으며 그는 아들의 사진 몇 장을 함께 묻었다. 아들의 목소리, 웃음, 함께 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을 거기에 영영 묻었다. 그리고 아들이 떠난 후 그는 부쩍 늙었다. 

남은 큰딸마저 결혼해 이역만리로 떠났다. 가끔 미국의 큰딸을 만나러 비행기를 탔다. 일생 전투기를 몰던 그는 여객기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 패기 넘치던 젊은 시절이 있고, 돌아오지 못하는 아들이 있는 그 하늘을 날아가면 그리운 큰딸을 만날 수 있었다.     


언제인가부터 그는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것이 더 많아졌다. 약을 먹었는지 아리송했고, 밥을 먹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거동이 전 같지 않게 불편해졌고, 이유 없이 화가 솟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길에서 넘어진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집에 온 구급차를 타고 싶지 않아 한사코 버텼다. 이대로 떠나면 다시는 집에 못 돌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꼼짝할 수조차 없었으므로 결국 아득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그는 병원에서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은딸에게 매일 졸랐다. 집으로 가겠다, 집으로 가야 한다.    

 

“엄마가 조금 아파서 서울의 병원에 입원했어요. ”

어느 날 딸이 말했다. 그는 딸이 이야기한 ‘조금’이 실제로는 조금이 아닐 거라고 짐작했다. 아내는 많이 아픈 것 같다고,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서울에 있는 큰 병원까지 가서 입원했을 리가 없다고. 그래서 그는 딸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여기 그냥 더 있어야겠구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고, 서울의 병원에 있다는 아내에게 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딸을 더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알았다. 아내는 바로 옆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누워있는 아내를 만나러 옆 병실에 갔다. 아내와 그는 서로의 늙고 병든 손을 잡고…. 그저, 울었다.   

  

딸이 거의 매일 왔다. 옆 병실의 아내에게, 그리고 그에게 들렀다. 오후에 출근해야 하는 딸은 오전밖엔 머무를 수 없었다. 딸이 가고 나면 그에겐 다시 긴 고요의 시간이 왔다. 벽을 사이에 두고 누운 늙은 아내를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꾸 보이기 시작했다. 퇴원하거든, 부모님 산소에 가보아야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점점 더 나빠졌다. 중환자실에 누운 그에게 딸이 매일 물었다. 

“아빠, 머리는 안 아파? ”

“...괜찮아….”

그는 대답했다. 늘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열 번 물으면 열 번 대답했다. 괜찮아….  

   

그는 이제 이곳 어디에도 없다. 그가 영영 돌아가 누운 자리에 그의 딸이 찾아와 종종 묻곤 한다. 

“아빠는…. 괜찮아?”

딸은 듣지 못하겠지만, 그는 그때마다 대답한다. ‘응, 괜찮아, 괜찮아.’

내 자식이 괜찮기만 하다면, 나는 정말이지 그 무엇도 다 괜찮다…. 라고 그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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