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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Mar 14. 2023

예고편은 없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길이었다. 봄은 성큼 등 뒤에 와있어서 따뜻했다. 바람은 적당하게 불었다. 음…. 좋은 날이야, 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이었다. 5센티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보도블록에 걸려 붕 떴다. 넘어지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고 손을 허우적댔지만, 바닥에 쾅 엎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핸드폰과 가방이 나동그라지고, 가방 속에서 책 몇 권과 아이패드 펜슬이 튕겨 나왔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걸으며 핸드폰을 들여다본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와 이야기하는데 정신이 팔려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날씨가 너무 좋다고, 바람 속에 섞인 봄 내음도 좋다고 킁킁거리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그 일은 그렇게 창졸간에 벌어졌다.      


나는 워낙에 잘 넘어지는 사람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늘 무릎에 상처와 멍을 달고 살았다. 이런 넘어짐의 경력자인 나에게 이번 사건은 남다른 촉이 왔다. 여태까지의 넘어진 충격과는 다른, 그런 느낌이었다. 제대로 걷기 힘들어 절뚝거리며 평소 5분이면 가는 집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오른쪽 다리로 다친 왼쪽 다리를 끌고 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건널목 앞에 섰다. 왕복 6차선 대로는 대각선 방향으로 총 6개의 횡단보도에 동시에 초록 불이 들어오므로 건너는 시간이 꽤 여유 있는 편이다. 그런데 막상 앞에 서니 6차선이 아니라 12차선쯤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 보였다. 그 순간, 걸음이 느리고 힘든 어르신들이나 장애인들의 마음이 어떤 것일지 확 와닿았다. 결국 신호가 꺼지기 전까지 그 6차선 횡단보도를 건너갈 자신이 없어 몇 번의 초록 신호가 켜졌다가 빨간 신호로 바뀌는 것을 하염없이 보며 화단 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무릎의 상태는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구부러지지 않았고, 힘이 빠져서 왼쪽 다리는 저 혼자도 덜덜덜 떨리며 제어가 되지 않았다. 결국 가족들의 부축을 받으며 응급실에 갔다. 차에 올라타는 것도, 내리는 것도 다 힘들었다. 아무래도 무릎에 큰 사달이 났나보다 싶어 다리는 아프고, 마음은 심란했다.

대학병원의 응급실 분위기를 모르지 않는다. 부모님이 함께 아프시고, 연달아 돌아가신 시간을 겪었으니 그 풍경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두 분이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났다. 그곳에 또다시 앉아 있자니 여러 가지 마음이 들락날락했다. 새삼스럽게 부모님을 떠올리며 안타까운 마음, 후회되는 것들의 아쉬운 마음, 그리고 겁이 난 어린아이가 되어 응석과 엄살을 부리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이었다.    

  

엑스레이, CT를 찍고 피를 뽑고 소변검사도 했다. 응급실엔 보호자 한명만이 동행할 수 있어 주차하느라 늦게 온 남편 대신 딸아이가 보호자로 따라다녔다. 보호자가 써야 하는 여러 가지 동의서, 진료수속등 연신 불려 다니며 무언가를 쓰고 사인하며, 그 와중에 내 휠체어까지 밀고 다니는 딸아이를 물끄러미 봤다. 여러 해 전 나의 모습이 중첩되어 보였다. 사는 것은 이런 것일까. 서야 할 정거장에 버스는 꼬박꼬박 들렀고, 매번 멈추는 것이다. 누군가는 내리고, 누군가는 좀더 가는 버스 안에 앉아 있는 나를 생각했다. 여섯해전 먼저 내린 부모님을 생각했다.     

여러 가지 검사의 결과가 나왔다. 슬개골이 4조각으로 골절되었다고 했다. 이 나이를 먹도록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걷게 해주었던 내 슬개골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존재를 잊고 감사할 줄 모르고 산 내게 슬개골이 말하고 있었다. 조심 좀 하지 그랬어!


나사를 몇 개 박고 철사 같은 것으로 슬개골을 감싸서 골절 부위를 보호하는 거라고 했다. 몸속에 나사와 철사를 박는다는 것도 후덜덜하지만, 일 년쯤 후에는 그것을 빼내는 수술을 또 해야만 한다고 하니 한층 더 마음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주변에서 교통사고 등으로 뼈에 철심을 박는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으나 그 비슷한 경우가 내게 닥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기야 사람이 살면서 자신에게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사는 사람이 있을 리는 없다.     


다친 그 날은 이상하게 아침부터 모든 것이 어긋났다. 12시와 3시에 글쓰기 수업이 있는 날이었는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연락 없이 수강생이 오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두 번의 수업 모두 그랬다. 오지 않은 이유도 하나같이 ‘깜빡 잊었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업 시간을 항상 잘 지켰고, 오히려 내가 놓치는 부분까지도 알아서 챙기던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그들이 깜빡 잊었다는 그 시간은 결국 나에게로 와서 운수 나쁜 날의 시작이 되었다. 수업으로 인해 하루 일정은 모두 날아갔다. 12시 수업이 펑크났지만 3시 수업 때문에 할 수 없이 기다려야 했다. 책을 한 권 다 읽어낼 즈음 두 번째 수업의 수강생 역시 믿을 수 없게도 깜빡 잊고 말았다는 연락이 왔다.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라고 했으나 솔직히 괜찮지 않았다. 터덜터덜, 다 읽은 책이나 도서관에 반납하고 들어가야겠다며 발길을 옮겼다. 바로 그때 5센티도 채 되지 않는 얕은 턱에 걸려 몸이 부웅, 떴고 안 넘어지러 온몸에 힘을 주었지만, 팔다리를 허우적대다 결국은 보도블록 바닥에 제대로 쾅, 엎어진 것이다.   

  

설마 했던 일은 현실이 되었다. 좀 심한 타박상 정도를 기대하기엔 상태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최악의 경우로 실금이 가서 깁스 정도로 끝나길 바랐다. 하지만 슬개골이 네 군데나 골절되어서 결국은 응급수술을 해야 했다. 마침 무릎 전문의가 당직이어서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온 새벽 1시에도 응급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딸이 말했다. 

“엄마의 나쁜 운수는 넘어진 것까지였고 그 이후엔 운수가 좋은 거네. 마침 무릎 전문의가 당직이기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주말까지 끼어서 며칠 기다릴 뻔했잖아. 정말 다행이야.”

딸의 말이 예뻤다. 이래서 또 하나 배우는 것이다. 다친 사람의 맘이라도 편해지라고 해준 소리이긴 하겠으나, 막상 들으니 굉장히 힘이 되고 부적처럼 간직하게 되는 말이기도 했다.     


침대 카트에 누운 채로 수술실에 실려 갔다. 자정이 넘은 병원복도는 고요에 잠겨있었다. 눈을 감은 채 실려 가다가 잠시 눈을 뜨자 병원 복도의 조명들이 휙휙 바퀴 소리를 내며 뒤로 멀어져갔다. 환한 조명이 가득한 수술실에 누워 팔다리에 벨트를 묶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담석증 수술도 한번 했는데 그때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수술실 침대에 누워 생각하는 건 밖에서 걱정하고 있을 내 남편도, 아이도 아닌 내 부모였다. 아빠, 엄마…. 나지막한 소리로 부르는 나는 그 순간, 영락없는 아이가 된다. 그리고 마취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듬직하게 보호자 노릇을 해내고 있는 딸이 보였다. 인생이라는 노선의 정거장에 또 한 번 이렇게 잠깐 섰다 간다. 아직은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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