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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Mar 17. 2023

내 슬개골과의 하루

                           

토요일 저녁에 응급실, 그리고 이어진 일요일 새벽 1시에 응급수술을 하고 3박 4일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 집만큼 좋은 곳은 없고, 인생에서 돌아가 쉴수있는 내 집 하나는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물리적인 집일수도, 마음을 채워주는 공간일 수도 있다. 그 어떤 형태이든 언제든 돌아갈 쉴 수 있는 집 하나를 갖고 있는 사람의 마음으로 살수있다는건 축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늘 환자가 많은 대학병원답게 병실은 빈자리가 드물다. 병상이 하나 비기가 무섭게 소독과 처리를 끝내고 나면 다른 환자가 들어와 눕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그런 순환의 절차를 거쳐 6인실 창가자리에 병상을 얻었다. 맥없이 넘어져 무릎뼈가 금가다니 정말 운수나쁜 날이라고 우울해해는 내게, 딸아이가 말했었다. 다친 순간까지가 운이 나빴던 거고 그 이후부터는 좋은 운인거라고. 대수롭지않게 집앞의 병원을 가려다 종합병원 응급실로 왔고, 주말에 마침 무릎전문의가 당직이었으며, 다른 지병도 없었고 저녁도 달리 제대로 먹지 않고온 터라 응급수술도 가능했다. 물론 코로나도 음성이었다. 

병원생활을 호캉스할 생각으로 머무는 것은 아니지만 누운 침대옆으로 내게 익숙한 거리풍경이 아주 멀리까지 보였다. 나쁜 운수는 넘어진 그 순간으로 끝난 거라는 딸아이의 말이 생각났다. 모든 것은 다 맘먹기 나름인 것이다. 어쩌겠는가. 창밖 풍경이나 보면서 위안삼아야지.     


코로나로 인해 우리사회의 모습들이 많이 바뀌었는데 그중 하나는 병원문화가 아닐까 싶다. 상주보호자는 1명만 등록가능했다. 그리고 등록시엔 코로나 음성확인서가 있어야 가능하며, 일단 병원건물밖으로 나갔다 다시 와야한다면 그 음성확인서 역시 다시 등록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보호자가 입원기간 내내 상주하거나, 다른 보호자와 교대해야하는 시스템이다.     

나는 한시간이면 끝난다고 하는, 의사로부터 ‘그리 큰 수술은 아니니까요’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왼쪽 무릎을 수술했으므로 바닥에 하중을 실어 딛으면 안됐다. 화장실에 갈때에도 목발이나 보조기구를 이용해서 걷지말고 반드시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해서 보호자가 필요했다. 주말동안에는 딸이 이틀을 있어주었다. 그리고 평일에는 새로 입사해 한달도 되지 않은 딸인지라 집안일로 회사를 빠지게 하는건 맘이 불편하니 대신 남편이 월차를 내고 평일에 함께 했다.      


머물고 있는 6인실에서는 인간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정형외과 병동답게 대부분 깁스를 하고 있는 환자가 많다. 한명의 환자만 간병인을 쓰고 있고, 나머지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딸들이 와있다. 모녀의 모습도 참 다양하다. 하하호호 깨가 쏟아지는 우스개소리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녀가 있는 반면, 매사에 험한 소리가 오고 가는 모녀도 있다. 코로나 음성확인서를 제출하고야 출입증을 받을 수 있으므로 사실상 이곳은 병동이면서 자발적인 격리장소이기도 하다.     


건너편 병상의 나이가 아주 많은 할머니는 딸이 계속 함께 하면서 하루종일 둘이 조용조용한 대화를 했다. 주로 딸이 말을 거는 쪽이었는데, 할머니가 대답을 하시거나 마시거나 딸은 입담좋게 말을 이어갔다. 할머니가 감정을 드러내며 행복해하는 순간은 손주와 영상통화를 할때였다. 매일 손주는 영상통화를 해왔는데 할머니는 손주에게 ‘나 금방 퇴원하니까 너희 엄마도 집에 갈 수 있어, 조금만 참아라’라고 했다. 딸이 잠들거나 복도에 나가 바람을 쐴 때면 할머니는 빨간 버선으로 창을 자꾸 닦았다. 난데없이 빨간 버선을 왜 가지고 계신지는 알수 없지만 틈날때마다 할머니는 그 빨간 버선을 손에 쥐고 창을 문지르곤 했다. 그걸 본 딸이 말했다. 

“엄마, 나가고 싶어? ”

낫지 않은 몸으로 아직 나갈 수 없는 할머니를 위해 딸이 창가에 서서 말을 걸곤 했다. 

“엄마, 저기 차들 많이 가네. 저 건물은 엄청 높다.”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빨간 버선을 손에 꼭 쥐고 딸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봤다.     


몇주전 엄마의 꿈을 꾼적이 있다. 꿈속에서 엄마는 아이같았다. 밥을 볶고, 채소와 건더기가 많은 쪽을 엄마그릇에 담고, 노른자가 봉긋한 계란을 올려 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라고 말했는데, 엄마는 아이처럼 한숟가락을 조심하지 않고 입에 꿀꺽 넣었다가 우는 소리를 했다. "아이, 뜨거워!"

나는 아이처럼 구는 그 모습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뜨겁다고 식혀서 먹으라니까.“

다시 작은 수저에 밥을 떠서 입으로 호호 불어 엄마 입에 한숟가락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깼다.     


건너편 침상의 모녀를 물끄러미 보면서 그밤의 꿈을 생각했다. 영상통화속 손주의 모습에 아이처럼 좋아하고, 밖에 나가고 싶어 창에 이마를 대고 선 엄마를 달래는 딸의 모습을 봤다. 엄마는 엄마라서 하지 못했던 투정을, 꿈에서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마치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된듯 그 투정을 받아주었다. 엄마가 좀더 투정을 부렸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꿈은 너무... 짧았다     


비어있던 옆 병상은 하루만에 새 환자가 들어왔다. 역시 이번에도 딸이 간병을 하러 따라 들어왔다. 환자인 어머니의 성격은 대단했다. 딸이 무슨 말을 하든 화를 냈고, 뭘 어떻게 해주든 맘에 안들어 했다. 딸은 그저 웃기만 했는데 그러면 또 바보 등신같이 군다고 타박을 했다. 오죽하면 다른 환자와 보호자들이 한마디를 거들 정도였는데 오히려 그 엄마는, 이렇게 해도 쟤는 뭘 제대로 하는게 없다며 계속 딸을 쥐잡듯 잡아댔다.

허리가 골절된 할머니는 꼼짝못하고 누운채로 딸에게 화를 쏟았고, 의료진들에게는 같은 말을 열마디씩 했다. 나중에는 주변 병상에서 그들을 멀리했다. 보호자로 내 옆에 앉았던 딸아이가 넌지시 말했다. 병실 바꿔달라고 할까.


할머니는 수술할 정도는 아닌 골절로 판명이 되어 보조기만 차고 다음날 퇴원하셨다. 여전히 일어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으므로 사설 엠블런스를 불러서 갔다. 병실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딸을 타박하며 모든 화를 쏟아붓는 할머니를 보고 다른 환자들은 오히려 딸을 걱정하며 그들을 보냈다.     

할머니가 나간 침대는 바로 젊은 여인이 차지했는데 보호자로 따라온 것은 남편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6인실이 너무 답답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대학병원의 병상은 늘 바삐 채워지곤 해서 2인실이나 4인실이 오히려 비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마침 6인실에서도 창가의 자리를 배정받아서 운이 좋았던 것이다. 하루의 해가 뜨고 지는 풍경이 잘 보였다. 멀리 내가 사는 아파트도 얼추 찾을 수 있을 만큼 병원은 근처였다. 내게 익숙한 길과 동네를 병원에서 내려다 보는 하루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회진시간이 되어 담당의가 병실에 와서 내게 웃으며 물었다. 

”언제 퇴원하고 싶으세요?“ 

당연히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요! 저어기 우리 집이 보여요.“

집이 보인다는 내 말에 크게 웃으며 의사의 퇴원허가가 떨어졌다. 3박 4일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맥없이 넘어졌고, 응급실에 갔고, 한밤중에 응급수술을 받았다. 어떻게 지나갔나 싶은 며칠이었는데 이제 지나고 보니 또 꿈결같다. 


집에 왔다고 해서 내 다리가 나은 것은 아니다. 보조기를 차고 있으며, 2주후 실밥을 빼러갈때까지 목발을 딛고 최대한 하중을 싣지 말라는 의사처방을 따르는 중이다. 수술한 쪽 다리의 붓기는 아직 완전히 내리지 않았으며, 통증이 사라진것도 아니다. 많이 누워있어서인가 오히려 머리가 아프고, 목발을 딛고 다녀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화장실을 자주 가지 않게 된다.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환자로구나 싶은 매순간이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족들이었다. 남편과 딸아이는 알아서 다들 나의 일을 덜어주었으므로 편했다. 병원에 누워서,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생각한다. 가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평소엔 가족의 소중함을 못 느끼다가 내가 필요한 순간에 느끼게 되는 것이 다소 미안하긴 하지만, 사람이 이리 얄팍한 존재인 것을 어쩌겠는가. 가족은, 이래서 가족이구나 싶은 생각을 또 한번 하게 되니 딸아이의 말대로 운수가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만, 이런 과격한 방법으로 굳이 깨달을 것 까지야 하며 혼자 웃는다. 


지인이 퇴원한 것을 알고 안부전화를 해왔다. 어때요? 라는 그의 한마디에 우리 둘다 그저 한참 웃었다. 바로 얼마전까지 남편의 연이은 입퇴원으로 누구보다 심정을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둘이 한참을 그저 웃고나서 같은 말을 나눴다. ”뭐 웃어야지 어쩌겠어요.“

그렇다. 오늘도 웃을 수 있는 하루를 보내보자고 나의 금간 슬개골에게 말을 건네본다. ‘조심 좀 하지 그랬어!’라며 나의 슬개골은 여전히 툴툴대지만, 어제보다 오늘 기분이 좀 나아보여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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