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지 4
어제는 그렇게나 미친 바람이 불어대더니,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화사한 아침이다. 창밖을 내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한다.
“밭에 나가봐야겠네….”
누가 들으면 진짜 파워농부쯤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손바닥만 한 텃밭 하나를 집 앞에 분양받아놓고 매일 그 텃밭 생각을 하는 초보 텃밭 농부일 뿐이다.
텃밭의 로망은 현실과는 살짝 달라서 밭이라고 무언가를 심어놓으니 매일 물을 줘야 하고, 바람이 불면 행여나 상할까 봐 걱정된다. 무언가를 돌보고 키운다는 건 이런 것이었구나 싶은 나날이다.
어제는 그야말로 광풍이 불었다. 기상청 발표로는 초속 20m의 풍속이라고 했다. 길에 지나가다 떨어진 간판에 맞을 것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텃밭에 심어놓은 채소들이 멀쩡할까 걱정돼서 아침 일찍 물통과 장갑, 호미 등을 챙겨 카트에 끌고 집을 나섰다. 학생들이 등교하고 난 오전의 동네는 조용하다. 봄 햇살이 화사하고, 어제와는 달리 훈풍이 불어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흩날렸다. 집에서 나와 길 하나만 건너면 되는 텃밭으로 가니 그 세찬 바람에도 잘 버텨준 나의 텃밭 작물들이 보였다.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지난 주말에 모종이 모자라 다 심지 못한 빈 곳에 상추 모종을 더 심으려고 가지고 가 준비하는데 누군가 지나가며 말했다.
“어머, 텃밭 당첨되신 거예요? 축하해요. 경쟁률이 10대 1이었던 거 아시죠?”
나 역시 웃는데 그 옆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그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이고, 연락 좀 하고 삽시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 안에서 9년 전 이사했다. 같은 행정구역 동네이긴 하지만 9년 전에는 주택단지에서, 지금은 반대편 아파트단지에서 살고 있다. 그는 그 주택단지에서 살 때 이웃 주민이었으며, 딸아이들이 같은 초등학교에 다닌 동창이기도 했다. 나는 딸아이와 초등학교 동문이니, 그의 딸은 내 초등학교 후배가 되는 셈이기도 하다.
그가 행정복지센터의 주민자치위원으로 상당히 왕성한 활동을 하는 건 알고 있었다. 비록 낙선했지만, 기초의원 선거에도 그가 출마했던 것을 안다. 여러 해 전 선거운동을 하던 그와 잠깐 선 채로 인사 나는 이후 제대로 안부를 나눠본 것은 이십 년쯤 된 일이라며 서로 웃었다.
농사짓는 집 아들답게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들었다. 내가 심어놓은 가지와 고추, 깻잎은 너무 간격이 좁다고 했다. 뽑아서 조금 앞줄에 여유를 두고 옮겨 심으라는 말을 듣고 자리를 조금씩 옮겨주었다. 빈자리에 상추 모종을 마저 심고 흐뭇하게 돌아봤다. 제대로 자라기나 하려나 싶어 걱정스러운 맘에 그가 가면서 해준 한마디는 힘이 되었다.
“저래 보여도 땅에 심은 거는 다 살아나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또 한편 제대로 못 크고 죽을까 봐 걱정이라는 말에 그는 한마디 보탰다.
“죽으면 무슨 걱정이에요, 뽑아버리면 되지.”
혼자 웃음이 났다. 여전히 농사를 짓는 부모님 댁에 주말마다 찾아가 농사일을 거드는 그에겐 그저 밭작물일 뿐일 텐데 초보인 나는 그것들을 사람 대하듯 하고 있으니, 이러다 키운 것을 먹을 수나 있을까.
잠깐 텃밭 농부 놀이를 하고, 나의 작물들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근처에 종종 가는 카페에서 오늘의 텃밭일지를 쓰고 가야지 하고 들어섰는데, 안에 앉아 있던 일행들이 아는 체를 했다. 좀 전에 텃밭에서 만난 지인과 그 일행이었다. 얼결에 그들과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와는 주택단지에서 이웃으로 살았던 시간이 꽤 길었으므로 아이들이며, 나의 부모님과 가족들도 다 알았다. 오랜만에 서로 근황을 주고받았는데, 그 사이 아이들은 자라 성인이 되고, 부모님들은 연로해지고, 세상을 떠나기도 한 시간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세월은 참 빠르고, 지나간 것들은 그만큼 빨리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