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텃밭일지 6

by 전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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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모종을 심어놓은 것만 봐도 뿌듯했다. 흐뭇한 눈길로 그 귀여운 것들을 바라보곤 했다. 얼치기 농부는 “오늘부터 텃밭을 자유롭게 이용하시면 됩니다”라는 주민센터 직원의 말에 흥분해서 바로 인터넷에서 모종을 구입한다, 농기구를 사들인다 분주했다. 가족들과 함께 작은 텃밭에 몇 가지 채소를 심어놓고 매일 물도 주러 다녔다.


그런데 심은 지 몇 주가 지나면서 부쩍 남의 텃밭에도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나처럼 성급한 마음에 상추 모종을 줄지어 심어 둔 밭도 보였고, 왜인지 몇 주가 지나도록 호미질만 해두고 모종을 심지 않은 밭도 있었다. 어떤 곳은 모종이 아니라 씨앗을 파종했는지 앙증맞은 새싹이 올라오고 있기도 했다.

“모종 사러 갔더니 아직 고추는 이르다고 나오지 않아서 상추만 사다 심었어.”

내가 인터넷에서 가지와 고추 모종을 사다 심었다는 말에 옆 밭의 할머니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이셨다. 나는 속으로 이상했다. 날이 이렇게 한낮에 따뜻하다 못해 더운 날도 있는데 이르다니. 내 얼굴에 속마음이 쓰여 있기라도 한 것인지 할머니가 웃으셨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고 추우니 낮에 덥다고 해도 가지나 고추는 냉해 때문에 얼어 죽기도 하니까”

아…. 사람의 날씨로만 판단할 일이 아니다. 가게에선 이르다며 팔지 않는 모종을 인터넷에선 조언을 주고받을 일이 없으니 그저 팔고, 산다. 온라인판매의 좋은 점이 모두 다 좋은 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오후엔 정말 오랜만에 대학 동창 모임이 있었다. 수원에서 함께 통학한 입학 동기는 여섯 명이었다. 남자 셋, 여자 셋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도 스무 살 언저리의 적당히 치기 어린, 적당히 가벼운, 적당히 즐거운 사람들로 돌아간다.

도시에서 자란 나와 또 한 여학생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셨다. 내가 통학하던 시절에도 수원 시내에서 농사짓는 곳은 보기 힘들었으니 그들은 모두 수원 근교의 읍면에서 자란 친구들이었다. 지금 그들이 나고 자란 그곳은 택지개발과 사방에 뚫린 도로로 예전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일손을 거들기 위해 주말마다 본가를 찾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에게 나의 텃밭 자랑을 했다. 다들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내가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큰 것도 아닌데 시골 외갓집은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줄 알고 자랐다.

“야! 너 땅콩이 어디서 나는지나 알아?”

친구 중 하나가 신입생 때 나를 놀렸다. 그의 집에선 땅콩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이름이 땅콩이니 땅에서 날것이라는 합리적 추론까지 댈 필요 없이 상식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갓 스무 살이었던 나는 잠시 생각했다. 땅콩이…. 어디서 열리더라? 그 이후 땅콩만 보면 그때 일이 생각나서 웃곤 한다.


친구들에게 나의 텃밭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상해. 심은 지 몇 주가 되었는데 구불거리고 곧게 가지를 뻗는 것 같지도 않아. 이러다 다 죽는 거 아닐까?”

우리 나이라면 이제 작은 화면 보기가 쉽지 않다. 걱정스러운 나의 말에 다들 핸드폰 화면을 적당히 멀리 떨어뜨리고, 사진은 손가락으로 크게 확대해서 들여다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스무 살 무렵 신입생으로 다들 만나 보낸 한 시절이었다. 입시에서 해방되었고, 성인이지만 학생이었으므로 아직 치열한 돈의 세계에 발을 넣지는 않았던 시절이었다. 이제 중년을 넘어가는 즈음이다 보니 어느새 핸드폰은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고 봐야 그나마 선명하게 보이는 나이가 된 것이다.

“괜찮아, 안 죽어. 근데 좀 일찍 심었다.”

“이제 물 매일 줄 필요 없고 며칠에 한 번만 줘도 돼. 잊어버리고 있으면 어느 날 확 커 있을걸?”

다들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에겐 역시 농사란 나면서부터 살아온 세계였으니 나와 같은 경이로움이나 두근거림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름 농사일 속에서 커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니 꽤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다시 사진 속의 내 텃밭을 봤다. 걱정하면서도 자랑스럽고, 물주는 일이 은근 귀찮다고 말하면서도 조금 으쓱해지는 나의 텃밭. 그 텃밭 사진을 들여다보는 나 역시도 친구들처럼 슬쩍 핸드폰을 멀리 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하다, 모두 동년배들 아니던가.

어쩌면 사는 일도 이런 것일지 모르겠다 싶은 맘이 들었다. 매일 시선을 고정하고 있지 않아도 어느 날 문득 바라보면 쑤욱, 자라있는 작물들처럼 모든 것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눈에 잠시 멀리두고, 마음에서도 잠시 떨어뜨려둔다. 믿는 것이다. 매일 눈을 떼지 않고, 안달복달하며 매달려있지 않아도 그들은 잘 자랄 것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한결 더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것이 작물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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