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지 10
“걱정하지 마세요. 가지가 자라면 이만~큼 키가 커요. 가운데 것은 뽑아서 앞에 빈자리로 옮겨 심으세요.”
모종을 심은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한 뼘만 한 가지가 꼿꼿하게 대를 세우지 못하고 구불거리며 도무지 살 것 같지 않아 걱정하던 내게 이웃이 말했었다. 하지만 그의 말과 달리 가지는 영 키가 자라는 것 같지도 않고, 줄기를 곧게 뻗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런 나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이제 하루가 다르게 작물들이 쑥쑥 크는 것이 보인다. 5월이 되면서 날씨가 부쩍 포근해지다 못해 한낮엔 살짝 더울 지경이다. 때맞춰 봄비까지 이틀 정도 충분히 내리고 난 다음엔 내가 왜 걱정을 했던가 싶다.
“우리 OO이 한참 먹을 때는 학교 끝나고 오면 앉은 자리에서 식빵 긴 것 한 줄을 혼자서 다 먹어 치우더라고. 그렇게 먹더니 그때 키가 쑥 크더라. 그러니까 애 먹겠다고 하면 그때는 무조건 잘 먹여야 한다. 아무 때나 크는 게 아니야. 키 크는 것도 다 때가 있어. 살이 다 키로 가는 법이니 걱정하지 말고 잘 먹여야 해. ”
엄마는 고등학생이던 동생이 그렇게 먹성 좋더니 결국 키가 훌쩍 크더라는 이야길 하며 내게도 딸아이가 먹겠다는 것을 열심히 챙겨 먹여야 키가 큰다고 말했다. 나는 키가 그리 큰 편이 아닌데 남편은 키가 컸다. 요즘은 중학생만 되어도 이미 어른 키를 넘는 아이들이 많다. 딸이 어렸을 땐 키가 작은 축에 들어서 엄마는 늘 손녀가 키가 작을까 봐 신경을 썼다. 아이가 키가 작으면 시댁에서 외탁했다고 할 거 아니냐며 친정엄마다운 걱정을 하는 것이다.
며칠 사이에 확 키가 크고, 이파리도 넓게 뻗기 시작한 가지를 보며 왜 뜬금없이 그때 생각이 났을까. 어느새 초록으로 무성해진 작은 텃밭에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빛나는 초록 잎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떠난 동생과 엄마를, 만날 수 없는 가족들을 생각했다.
모든 것은 때가 되어야 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텃밭에 드나들며 다시 한번 몸소 체험하듯 느끼게 된다. 맞는 말이었다.
모종을 심어두고 매일 들여다보고 물을 주어도 대를 튼실히 세우고, 잎을 키우는 데는 그들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의 속도 역시 작물마다 달라서 상추는 금방 잎을 펼치기 시작했지만, 고추나 부추, 쪽파는 더디게 자랐다. 각자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만의 걸음으로 그렇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가는 것이다. 내 마음이 급하고, 조바심이 난다고 해서 어찌해줄 수도 없는 그들의 일이므로 그저 나는 묵묵히 물을 주고, 다정한 눈빛으로 지켜봐 주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도 그럴 것 같다. 나이를 먹는 일, 어른이 되어가는 일, 아이를 어른으로 키워내는 일, 미처 몰랐던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되는 일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알아가는 일은 모종이 키를 키우고, 귀여운 잎을 크게 펼치고 열매를 맺는 일과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할 일을 마친 작물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때엔 또다시 우리가 살고 또 죽는 일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경지에 오른 인간은 되지 못했다. 그저 나는 이제 잎을 펼쳐내고 있는 상추들을 보며 기특해하고, 키가 부쩍 큰 줄기를 빳빳하게 세우기 시작한 가지를 보며 환호하는 초보 텃밭 농부일 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나는 살아있고, 인생을 가꾸듯 텃밭을 가꾼다. 그러니 오늘도 어제처럼 다정한 눈빛으로 내 푸른 작물들을 바라보고, 맑고 차가운 물을 뿌려주는 일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