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가 살던 관사는 4호관사라고 불렸다. 1호관사는 단장관사, 2호관사는 부단장 관사를 지칭했다. 다분히 군대다운 관사호칭인데 어떤 연유로 우리가 살던 관사가 4호관사가 된 것인지는 알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 아빠의 직책이 부대에서 네 번째로 높았던 것 같기도 않은데 말이다. 아무튼 우리들은 그곳에 사는 동안 4호 관사 아이들이었다.
군인인 아빠덕에 늘 관사 생활을 하던 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4호관사는 좀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아파트 관사에서 살다가 이사한 4호관사엔 작은 텃밭이 있었다. 울타리가 없는 주택관사였으니 따로 마당 개념없이 트인 공간이지만 안방 창무밑에 장독대가 있고, 그 앞에 우리 가족보다 먼저 와서 살았던 누군가 가꿔놓은 그 텃밭이 있었다.
아마도 나는 어린시절에도 텃밭의 로망이 있던 아이였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사한 날 장독대앞의 그 작은 텃밭을 보고 엄마에게 ‘가져도 되냐’고 물었다. 거기에 꽃씨를 심겠다고 우겼다.
어디서 보고 들은 건 있어서 호미로 땅을 고르고 엄마와 시장에서 사온 꽃씨를 심었다. 봉선화, 맨드라미, 사루비아 같은 붉은 꽃들이었다. 어린이들은 대부분 채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역시도 채소보다는 소시지가 더 좋은 아이였다. 설령 채소를 좋아한다고 해도 아이들이 텃밭에 채소를 심어 먹을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그저 아이들에겐 예쁜 꽃이 먼저였다.
동화속에 나오는 멋진 꽃밭, 그림책속의 아름다운 한 장면만을 꿈꾸며 호미로 땅을 파고 꽃씨를 소중하게 심고 흙을 덮어주었다. 매일매일 물을 주었다. 그러나 끝내 텃밭에선 싹이 돋지 않았고 , 그 어느 꽃도 피어나지 않았다. 상상속의 화려한 꽃밭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호기심은 땅속에 묻혀 끝내 싹을 틔워올리지 못한 그 꽃씨들과 함께 사라졌다.
가끔 그때 뿌린 꽃씨와 끝내 싹이 돋지 않은 꽃들을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된 이후에 누군가에게 들었다. 모든 씨앗은 제 몸길이의 세 배가 넘어가면 절대 싹을 틔울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제서야 생각했다. 내 어린날 텃밭에 심은 꽃씨들이 그 어떤 것도 싹을 틔우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구나. 나는 그때 손가락 하나의 깊이보다도 더 깊이 심었던 것 같다. 그러니 어떻게 싹을 틔울 수 있었겠는가.
텃밭에 채소를 심어두고 종종 드나들며 볼때마다 어린시절의 작은 내 텃밭을 생각했다. 결국 어떤 싹도 올라오지 않고 관심에서도 멀어진 그 텃밭 말이다.
싹이 돋지않은 텃밭이 있던 그 관사는 내가 어릴적 살았던 관사들중 제일 맘에 드는 곳이었다. 커다란 관사단지의 정문을 지나 올라가면 1,2호 관사가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모여있는 관사구역이, 그리고 왼쪽으로는 우리가 살았던 집을 포함헤 관사 네 채가 있었다. 그 관사 네 채가 있는 지역은 제법 넓었기에, 테니스장이며 여러그루의 밤나무도 있었다. 그래도 역시 달랑 네 채의 집만 지어두기엔 아까운 공간이다. 지금은 그 공간을 민간에 매각하여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옛동네의 그 아파트단지를 지날때면 어린시절 내 텃밭이 있던 그 관사를 떠올리곤 한다. 언제나 아련하고 그리운 순간이다.
맞은편 관사의 아이들은 암묵적으로 우리쪽 구역에 넘어오지않았다. 우리도 가끔 그쪽 구역에 가서 놀기도 했는데 아는 친구가 없어 곧 시들해졌다. 결국 옆집의 아이들과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용하는 이가 별로 없어 군데군데 풀이 돋아나던 테니스장. 작은 밤이 열리던 밤나무들. 아무도 오지않던 관사경비초소. 전시도, 비상상황도 아니었으므로 헌병은 정문에만 있었기에 집앞의 경비초소는 버려지다시피했다.
우리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 그 경비초소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놀았다. 비오는 날이면 축축하고 눅눅한 습기가 가득하던 초소의 냄새. 뜨거운 한 여름날에도 서늘하고 선선한 공기로 가득하던 초소안은 우리들의 휼륭한 놀이터였다.
“가서 두부 한모사와라!”
엄마가 말씀하시면 돈과 바구니를 들고 그 초소로 올라갔다. 초소의 창문밖엔 작은 가게가 있었다.
“아줌마! 두부주세요”
우리가 소리지르며 바구니에 줄을 달아 내려보내면 가게 아줌마는 돈을 빼내고 대신 두부를 바구니에 담아 줬다. 우물에서 두레박을 길어올리듯 두부를 길어 올려 엄마에게 가지고 갔다.
두부를 길어올리던 어느날 저녁을 잠시 떠올리며 지금의 텃밭을 물끄러미 둘러봤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채소를 심었다. 고추, 치커리. 갓 등으로 오월의 텃밭은 푸르게 빛난다. 나의 텃밭도 마찬가지로 가지, 깻잎, 고추, 상추등이 숙쑥 자라고 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사루비아, 봉선화, 맨드라미 같은 붉고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는 풍경을 상상하며 씨앗을 심었는데 막상 어른이 된 나는 꽃을 심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참 당연하게도 채소만 심었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