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지 9
연휴 전인 지난 목요일에 텃밭에 물을 주었다. 금요일부터 어린이날이 들어있는 연휴의 시작이었지만 비가 왔다. 강원도에 가 있는 3일 동안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는 계속 소소한 빗줄기가 흩뿌렸는데 막상 여행하고 있는 인제가 아니라 자꾸 수원 날씨를 검색했다. 나의 텃밭 채소들이 잘 있을까 걱정이 됐다. 너무 폭우가 온다든지, 뭐가 날아다닐 정도의 거센 바람이 분다든지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늦잠을 잤다. 남편은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운전을 즐기지 않고, 나는 마찬가지로 여행을 좋아하지만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 덕에 늘 운전대는 내가 잡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친 다리가 왼쪽이기 망정이지 오른쪽이었으면 어쩔뻔했냐고 웃었다. 하지만 역시 나도 나이를 먹는다. 사흘 내내 운전하고 다녔더니 오늘은 평소 자지 않는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집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이제 텃밭에 나가볼까. 아무리 비가 왔어도 일요일은 개었으니 오늘쯤은 물을 주지 않더라도 다들 잘 있는지 보고 와야겠어, 하는 마음으로 나섰다. 텃밭은 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곳답게 간단한 농기구들이 갖춰져 있다. 물 조루 역시 갖추고 있으므로 빈손으로 주머니에 동전 몇 개만 넣고 집을 나섰다.
“엄마가 올 때 붕어빵 사 올게.”
강아지에게 인사를 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건널목만 건너면 텃밭이고, 텃밭 옆엔 붕어빵을 굽는 아저씨의 작은 매대가 있다. 겨우내 그 아저씨에게 붕어빵을 사 먹으며 우리 집이 붕세권임을 실감했었다. 날이 더워지며 붕어빵집 손님은 줄었으나 아저씨는 여전히 매대를 열고 있다. 이번 달 말에 한국에 놀러 온다는 조카와 언니를 생각한다. 그들이 올 때에도 아저씨가 붕어빵 장사를 계속했으면 싶다. 한국의 붕어빵을 맛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저씨는 쉬는 날인지 영업을 하지 않았다. 아쉽네…. 혼잣말을 하며 텃밭에 들어섰을 때 깜짝 놀랐다.
나의 작은 텃밭 채소들은 며칠 동안 몰라볼 만큼 쑥쑥 자라있었다. 상추들은 포기사이의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잎이 커져 있었고, 허리를 세우지 못하고 있어 걱정을 산 가지들은 제법 빳빳해진 자세로 키를 키웠다. 깻잎도, 아삭이 고추도 그 며칠 사이에 상추만큼은 아니어도 몰라볼 만큼 자라있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였다.
친구들이, 잊고 며칠 있다 보면 확 자라있을 거라는 말이 맞았다. 역시 경험만한 선생은 없는 법이다. 그들의 말이 이제야 실감 났다. 그리고 훌쩍 자라있는 채소들이 어찌나 이쁘고, 또 나 자신이 뿌듯하던지.
수확할 정도로 상춧잎이 커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손에 쥔 것 없이 나왔지만 이렇게 커졌으니 상춧잎 몇 장은 따서 들고 가야겠다고 첫 수확을 시도했다. 그냥 잡아 뜯으면 되는 걸까 싶어서 스마트폰을 꺼내어 상추 따는 법을 검색했다. 그때였다.
“이거 밖에부터 자라난 잎들 다 따야 해요. 오늘 안 따면 하루 이틀이면 다 쇠어버려서 상추를 먹을 수 없어요. ”
옆 텃밭의 노부부가 내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내 텃밭의 상추를 몇 장 뜯으시며 제일 밖에 있는 것들은 시들하니 어차피 못 먹는 거라며 떼어 버리고 안쪽의 커다란 상춧잎 몇 장을 뜯어주셨다. 아, 저렇게 하는 것이로구나 싶어 할아버지가 하시는 것을 따라 했다.
길가에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아주머니는 페달을 멈추고 노부부와 내가 상추를 따는 것을 한참 보았다.
“나도 상추를 기르는데 상추쌈 먹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잘게 썰어서 고추장 넣고 비벼 먹어요. 그게 제일 간단하고 맛있더라고요. 나물 비빔밥보다 맛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상추를 따고 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아지기 시작해서 이걸 다 어쩌나 싶던 차였다. 상추를 잘게 썰어서 비빔밥이라…. 좋은 생각이다.
“상추는 원래 돌아서면 또 난다고 하잖아요. 이거 삼일만 있으면 또 오늘 딴 것만큼 따게 될 거예요.”
놀라는 내 얼굴을 보고 옆 텃밭의 할머니가 웃으셨다.
“이웃도 나눠주고, 쌈이랑 겉절이도 해서 부지런히 드세요.”
노부부는 상추와 고추를 심어두셨다. 그들의 분위기처럼 텃밭도 정갈하게 나란히 오와 열을 맞춰 상추를 심어두신 것이 인상적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공용 물 조루를 받아다 그들의 밭에 물을 뿌렸다.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부부가 말하는 것을 곁 귀로 들으며 상추를 마저 땄다.
빈손으로 물만 주고 돌아가려던 길이라 얼른 옆 슈퍼에 가서 20리터짜리 재사용 봉투를 사 왔는데 뜯은 상추는 20ℓ 봉지의 반 가까이 담겼다.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양이다. 옆 노부부의 말씀대로 이삼일 후에 또 이만큼을 수확할 수 있으려나 싶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갑자기 너무 많은 양에 당황스럽기도 하다.
세 식구뿐인 살림에 상추를 사더라도 한 끼 먹고 없앨 만큼을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신기하게도 상추가 쑥쑥 자라나 주었으니 할머니 말씀대로 이웃께도 나눠드려야겠다. 내가 키운 푸른 상추들이 누군가의 저녁 식탁에 올라 웃음과 두런두런 나누는 말소리들 사이에 한 끼가 되는 것은 뿌듯한 일이다. 행복한 일이다. 그러니 텃밭의 계절 동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초급텃밭 농부의 삶을 살아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