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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Jun 03. 2023

그녀의 글쓰기 수업


                                  

“우리가 십년쯤 빨리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순옥씨가 샤프펜슬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손가락 마디엔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고, 거친 손등과 끝이 부서진 손톱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순옥씨는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배운 지식도, 써먹을 별다른 기술도 익히지 못한 그녀에게 세상이 쉬웠을 리가 없다. 젊어서부터 식당 주방에서 일했고, 좀더 나이가 든 이후엔 오랜 간병인 생활을 거쳐 지금은 요양보호사 일을 하고 있다. 먹고 살아야 하니 버스에 붙은 행선지와 번호, 그리고 식당의 메뉴판 정도를 볼줄 안다고 했다.


“나는 꼭 한글을 배우고 싶어요. 꼭 배워야 해요, 날 가르쳐줄 수 있어요?”

요즘 세상에, 그리고 전국에서 가장 평균 연령대가 젊다고 하는 동네에서 무학인 분을 만날 거라고는 솔직히 생각 못 했었기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칠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이제 더 늦으면 영영 못할지도 모른다고, 좋은 일한다 생각하고 한글을 가르쳐주면 안되겠느냐며, 꼭 배우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녀는 나에게 일주일에 한번, 두시간씩 한글을 배운다. 요즘같이 너나할 것 없이 컴퓨터를 다루고, 키오스크로 음료를 주문하는 세상에도 무학은 있고, 문맹은 있다는걸 그녀를 만나고서야 실감했다.

우리는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어느 날은 어린왕자가 여우를 만나 별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또 어느 날은 쉽고 가벼운 시를 받아쓰기 한다. 요즘은 뉴스를 받아쓰기하고 있다. 그녀의 나이도 일흔을 바라보지만, 나 역시도 그리 젊기만 한 나이는 아니니 우리의 관심사는 아무래도 건강이다. 그래서 주로 건강정보에 관한 뉴스를 받아쓰기한다.


그녀가 받아쓰기를 하고 난 다음이면 나는 빨간 펜으로 검사를 한다. 한 문단에 빨간 체크표시가 되어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아이처럼 그 빨간 체크 표시를 아쉬워하는 그녀를 위해 받아쓰기할 때 나는 슬쩍 슬쩍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렇게해서라도 빨간 체크가 적은 날은 순옥씨의 얼굴이 밝아진다. 나는 그녀의 그 밝은 얼굴이 좋아서 또다시 슬쩍 힌트를 주곤 한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세요, 순옥님. 아까 앞에서도 ‘그렇게’가 한번 나왔었지요?”      


순옥씨와 한글 수업을 한지가 벌써 여러달되었다. 한주에 한번, 두시간씩 수업을 한다고 해서 눈에 띄게 한글이 늘어나지는 않지만 어느순간 불쑥 나아졌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순간엔 그녀도 나도 함께 좋아한다.

“내가 이제 텔레비전을 보면 자막이 눈에 들어와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선생님 정말 복받을거에요.”

공부를 하는 것은 그녀이고, 나는 그녀에게 수업료를 받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늘 내게 복받을거라고, 너무 고맙다고 말한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언제인가부터 내가 오히려 그녀에게 배우고 있는건 아닐까.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녀와의 만남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종종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녀는 글을 쓸 줄 모르고, 쓴다 해도 다 틀려버린 엉터리 맞춤법이지만 드러날 일이 없이 그간 살 수 있었다고 했다. 은행이나 관공서에선 자기이름과 숫자정도만 쓰면 됐고, 그녀는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했으니 문서작성을 할 일도 없어 괜찮았다고. 그런데 세상이 좋아지고, 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은 모두에게 편리하고 좋아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전화를 걸어 말로 하던 세상에서 이제 너나 할것없이 모두 스마트폰을 가지고 문자와 카톡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키오스크를 익혀야 음료 한잔을 사먹을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은 비대면시대로 변하고 있다. 한글을 정확하게 읽고 쓰지 못하는 그녀에게 카톡시대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양보호사 일을 하면서도 대부분은 카톡으로 업무상 전달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교회에 다니는 그녀는 카톡으로 교인들과의 모임을 해야했다.


한글을 제대로 쓸줄 모르는 그녀는 문자나 카톡앞에서 선뜻 나설 수 가 없었다고 한다. 맞춤법이 다 틀려버린 문자나 카톡을 보냈다가 망신당하면 어쩌지 싶어 모든 대답은 최대한 단답형으로만 한다고 했다. 그녀는 열마디의 말을 하고 싶고, 백가지의 표현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싶으나 두려움으로 항상 한두마디의 답신속에 자신의 의사를 담아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가 요양보호사로 다니는 집은 환자가 두명이었다.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중증장애인인 아들과 그 아들만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운신이 어려운 엄마, 이렇게 모자는 모두 요양보호대상자였다. 나는 그녀의 요양보호일에 대해 종종 들었다. 그러니 그녀가 어떤 궂은 일을 하는지, 누워서 꼼짝 못하는 스무살짜리 중증 장애인 아이에게 얼마나 애틋한 맘을 가지고 있는지 이제 안다. 마찬가지로 운신이 쉽지 않은데다 오랜 병고로 성격마저 예민해진 아이의 엄마에게 어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도 잘 안다.

가끔 그녀는 속앓이하며 내게 하소연을 했다. 그럴때면 나는 잠시 받아쓰기 교재를 덮어두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함께 그 아이의 어머니 흉을 볼때도 있다. 가끔 그녀가 애틋해하는 중증 장애인인 아이의 이야기에 덩달아 울컥할때도 있다. 그리고 또 가끔씩 그녀를 위로하는 어설픈 말을 건네기도 한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녀는 한글 수업을 받기 위해 요양보호사 일을 끝내고 요즘도 퇴근길에 빠지지 않고 수업에 온다. 태어나서 내 걸로 이런 문구는 처음 가져봤어요, 라며 배시시 웃던 첫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그녀의 필통 속엔 지우개, 샤프, 볼펜 등이 가지런하다. 두 시간 동안 쉬는 시간도 없이 열중한다.

사람들은 조금만 나이를 먹으면 젊을 때 하고 싶던 일을 생각하며 ‘늦었지, 이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다르다. ‘이제라도 하고 싶다’ ‘아직 늦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나는 그녀가 참 좋다. 그녀의 열정, 그녀의 의지. 나는 늘 그런 그녀를 닮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업시간에 그녀가 아주 부끄러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우리가 십년쯤 빨리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사실은 말이에요, 난 운전면허증을 따고 싶었어요. 한글을 배우면 그것도 할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예요.”

운전을 해온 사람도 이제 곧 내려놓을 나이지만, 그 운전면허증이란 것을 꼭 따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는 살짝 홍조로 물든 일흔이 가까운 순옥씨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다들 쉽게 따는 그 운전면허증이, 글을 모르는 그녀에겐 너무 나도 높은 벽이었을 그녀의 인생을 생각했다. 설령 이제 운전면허를 딴다고 해도 그녀가 운전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꿈이 운전과 운전면허증 그 어느쪽에 더 가까운 것이었는지 나는 알수 없다. 하지만, 할수 있지만 하지 않는것과 할수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다음 시간엔 운전면허시험문제로 받아쓰기 해봐요, 순옥님.”


순옥씨가 요양보호사일을 하고, 한글을 배우며, 운전면허증을 갖는 날을 꿈꾸듯 나는 오늘도 꾸준히 글을 쓴다. 오늘의 에세이에 그녀가 등장한 것처럼, 어느 날엔가 나의 소설에 그녀는 등장인물이 되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는 나 역시도 매순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늦은 건 아닐까, 라고.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를 생각하면 다시 쓰게 된다. 그러니 배우고, 또 얻는 것은 아무래도 그녀가 아니라 내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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