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일지33
"가지랑 고추는 이제 다 뽑고, 하는 김에 무성해진 잡초도 뽑아봐요.“
남편에게 호미와 목장갑을 쥐어주고는, 2차선 도로 건너편으로 갔다. 애플워치로 바꾼 후 서랍속에서 잠만 자고 있던 갤핏을 당근구매자에게 넘기며 사용법을 간단히 설명하고 서로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를 나눈후 다시 길을 건너왔다. 그런데 땀을 뻘뻘 흘리고 선 남편 뒤로 텃밭이 어째 이상했다. 뭐지? 왜 뭔가 잠깐 사이에 휑해진 느낌이지?
아이고, 세상에!
가지와 고추만 뽑고나선, 잡초를 골라 뽑으랬더니 이 인간이 가지, 고추, 깻잎에 서리태, 쪽파, 비트까지 싹 다 뽑아버렸네.
놀라서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 괴성을 지르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머쓱한 얼굴로 나를 봤다.
"다 잡초아니었어? 몽땅 다 뽑으라는 줄 알고..."
아무리 자연과는 담쌓은, 백화점과 마트구경을 좋아하는 남자라고해도 그렇지. 어떻게 잡초와 작물을 구분못하고 다 뽑아버리냐, 싶다. 분명 가지와 고추를 뽑고, 나머지 잡초를 골라 뽑으라 말했건만. 사태파악이 잘 안되는 듯한 천진난만한 얼굴에 무더위의 절정인 날이니 땀까지 비오듯 좔좔 흐르는 걸보곤 뭐라말도 못하겠고 어이가 없어 그냥 헛웃음을 웃고 말았다.
사실, 뽑는 김에 옥수수는 잡초로 안보이더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참았다. 그래, 참을 인자 세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더라.
대를 세우려던 서리태까지 죄다 뽑아놨고, 줄기찬 장맛비를 그나마 견디고 살아남은 비트도 날벼락이었다. 물론 잡초인지 아닌지 나조차도 가끔 헷갈리긴 했던 쪽파는 차마 뭐라 못하겠지만 옥수수를 빼고는 죄다 뽑아버려 날것의 흙더미를 그대로 그러내고 있는 텃밭을 보니 왜그리 불쌍하고 초라해보이던지. 뽑아낸걸 다시 심어서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상태가 좀 나아보이는 녀석으로 서리태 세줄기와 비트 두줄기를 다시 땅에 심었다. 그리고 상추모종을 심고야 허리를 폈다.
한숨이 난다. 이 더위에 제대로 살기나 하려나 걱정스런 마음이었지만 그저 응원하는 마음으로 물조루에 가득 채운 물을 꼼꼼히 뿌려주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 확실히 해가 좀 빨리 넘어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남편과 나눴다. 한낮에는 여전히 덥고 뜨겁지만 저녁해는 며칠사이 짧아진 것이 느껴진다. 바람도, 공기도 저녁엔 조금 달라진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는 걸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낮에 도서관다녀오는 길에 길가의 화단을 벌초하는 걸 본 이야기를 했다.
늘 추석전에는 남편이 친정 조부모님 산소의 벌초를 했다. 해마다 남편도 나이드는게 느껴지고, 힘에 부친다고 하면서도 오랜 세월을 해온 일을 이어왔다. 그런데 어찌된일인지 두어해전부터 누군가 미리 와서 벌초를 싹 해두었다.
우렁각시가 있나봐,라고 웃었는데 두해가 반복되자 이제 궁금해진다. 조부모님 산소 한 켠에 할머니의 지인봉분이 있다. 오랜 인연이라 차마 거절못하고 묏자리를 내어주었다시는데 수십년이 지나도록 그 후손들과 마주친 일은 몇 년전에 딱 한번이었다. 그들이 벌초를 하는 것일까 싶긴 하지만 알수 없는 일이다. 해마다 벌초하며 그 댁 봉분만 내버려두기 뭣해서 삼십년 가까운 세월동안 함께 벌초해드렸다. 그들이 우렁각시라면, 이제쯤은 우리가 해야지 않을까 싶어 갑자기 벌초를 나서서 한 것일까. 그들이 우렁각시가 아니라면 또 누구 달리 벌초를 해놓을 사람이 있는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라는 말을 나누며 집으로 걸었다.
”올해도 우렁각시가 올까? 그런데 세월 참 빠르다. 벌써 우리가 벌초 이야기를 하고 있네.“
웃으며 집앞에 당도했을 때, 문득 다시금 남편이 홀랑 다 뽑아버린 텃밭 생각이 났다. 수십년 처가벌초를 한 남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좀전까지 있었는데 갑자기 그만 울컥 했다. 다시 한번 참을 인자를 가슴속에 새기며 근엄하게 한마디 했다.
” 이제 가을농사 준비해야지. 이달말쯤엔 배추와 무를 심는거래. 이번엔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