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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원 Sep 01. 2023

싱가포르 1


비행기에서 내려 한 발 내디딜 때의 또 다른 공기. 낯선 나라의 여행자가 되었구나 싶은 설렘. 여행을 생각할 때면 늘 그 첫발의 느낌이 먼저 떠오른다. 

새벽 공항의 한산하고 적막함을 상상했는데, 막상 도착한 창이공항은 그 시간에도 사람이 제법 많았다. 어디론가 떠나는, 어디에선가 떠나온, 혹은 돌아온 이들로 공항은 새벽이라는 생각을 잊게 했다. 역시 서비스, 시설 등 여러 면에서 최상위권 공항다웠다.      


입국심사는 우리나라처럼 자동 출입국기계를 이용한다. 모든 나라의 외국인이 다 자동 출입국에 해당하는 건 아닌지 가능 국가의 국기가 전광판에 떠 있다. 자기 나라의 이름보다 국기가 직관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 국기로 표시한 것은 꽤 좋은 생각 같다. 외국에서 태극기를 보는 일은 반갑고 뿌듯한 일이기도 하고.

기계는 여러 대였지만 기계별로 줄을 서게 했다. 그래선지 처리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지는 않다고, 우리처럼 한줄서기를 하면 더 빠르지 않겠느냐며 친구와 말하다 웃었다. 역시 우리는 빨리빨리 민족인 것이 분명하다. 

출입국 키오스크에서 지문을 우리나라처럼 검지로 하는 건가 잠시 망설이니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엄지!”라고 말한다. 이런,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긴 하나 보다. 여러 해 전 로마의 테르미니역 앞 슈퍼에 가서 물건을 계산하고 났더니 계산원이 “봉다리?”라고 물어서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우리는 말했다. 대체 한국 사람이 얼마나 오는 거야, 계산원이 봉다리를 다 알다니.     


난데없이 “엄지!”라는 한국말 덕분에 싱가포르의 입국심사를 받으며 여러 해 전의 로마 여행을 떠올렸다. 그해에 아빠는 팔순이었다. 한해가 다르게 노쇠해져 가는 아빠는 기억하는 것보다 잊는 것이 점차 많아졌다. 특별히 즐거운 일도, 그렇다고 대단히 슬픈 일도 모르는 사람처럼 높낮이 없이 변해갔다. 잊는 것이 많아졌지만, 잊었다는 것조차 잊었으므로 아빠는 겉으로 봐선 그 어떤 파도도 없는 물에 떠 있는 사람 같았다. 

몇 해 지나지 않아 아빠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홀로 갔다. 지금도 나는 가끔 수면 아래의 아빠를 생각한다.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해의 영역이 아니며,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저 내가 보지 못한, 볼 수 없던 그 수면 아래 아빠의 모습과 아빠의 사간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때 좀 더 내가 아빠의 수면 아래를 보려고 노력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적어도 지금보다 덜 후회하지 않았을까.     


오래전 추억과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이처럼 아주 작은 실마리에서 시작한다. 실로 엮어낸 그 실마리를 잡고 주르륵, 많은 것이 풀려나온다. 풀려나온 실뭉치만큼 남아있는 무늬 역시 처음과는 다르다. 다시 실을 엮어 뜨면, 그때엔 또 다른 모양이 되겠지. 그런 것이 인생을 살아나가는 일일 테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있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시내로 들어가는 건 MRT가 가장 편하고 저렴하지만 새벽 도착이라 이미 끊긴 시간이다. 우리는 그랩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버도, 그랩도 앱을 깔아둔 지 오래지만 실제로 여행에선 한 번도 이용해보지 않았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세상은 자꾸 변하고 빨리 달라진다. 세상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만의 페이스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제 그 변화를 따라가야 하는 건 어느 만큼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걱정했던 것보다 그랩을 이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언어가 영어일 뿐 카카오 택시를 부르는 것과 같았고 다른 점이라면 기사가 배차됨과 동시에 결제가 이루어진다는 것 정도였다. 기사는 조용히 우리의 캐리어를 실어주고 차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가 내리고 나자 호텔 앞 도로를 가리키며 빨간 선이 그어진 곳에선 택시가 설 수 없으니 다른 곳에서 택시를 잡아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저 내려주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뒷자리에서 ‘택시’ 이야기를 했더니 아마 그 단어를 알아들은 듯했다. 이렇게 한 끗의 친절이 사람을 기분 좋게도 한다.     


레이트 체크인을 하고 호텔 방에 들어와 우리는, 이번 여행 시작이 참 순조롭다고, 그리고 별것 아니겠지만 새로운 것을 많이 해봤다고 말하며 뿌듯해했다. 그랩을 써봤고, 트래블월렛을 결제 수단으로 쓴다. 그리고 이미 인천공항에서 출국할 때 스마트패스를 이용했다. 미리 앱에 여권과 출국 정보를 입력해놓으면 얼굴인식만으로 출국장 보안검색대까지 직행할 수 있었다. 신문물이 자꾸 나오면 늦기 전에 써봐야지, 하며 우리는 웃었다. 

호텔 방에 들어가면 바로 뻗을 것 같다고 했지만 우리는 막상 여섯 시간 동안 밤의 하늘을 날아 낯선 나라 싱가포르에 도착한 흥분이 가시지 않아 한참을 더 깨어있었다. 내일의 싱가포르가 어떤 모습일지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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